콩반벌레반
롯데 타워가 생기기 전 롯데 백화점과 마트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수확하지 않고 심어만 놓은 콩이 가득한 콩밭이었다. 비쩍 마른 콩대에 콩꼬투리가 몇 개씩 매달린 드문드문 심어진 성의 없는 콩밭은 나와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흙장난을 하며 꼬질꼬질해지도록 콩밭 사이를 뛰어놀다가 무심코 벗겨본 콩 꼬투리에는 아주 부드럽고 촉촉한 콩들이 들어있었다. 관리도 안 하고 약도 치지 않았으니 꼬투리 안에는 콩반 벌레반으로 애벌레가 가득했다. 나는 벌레를 싫어하고 심지어 무서워도 하지만 콩깍지를 열며 비명을 지르다가 애벌레 하나가 너무 투명한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벌레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어린아이가 밥을 지어 본 일이 없으니 콩밥을 하려면 얼마가 가져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때는 다섯 알 어떤 때는 열 알 그렇게 콩을 모아다가 엄마에게 가져다 드렸다. 엄마는 많다 적다 이야기를 안 하시고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다가 먼지가 묻은 콩을 받아 저녁에 콩밥을 지어 주셨다.
은근히 편식을 했고 콩도 잘 먹지도 않으면서도 엄마가 콩을 넣어서 밥을 지어주시면 으쓱하고 기분이 좋아서 내가 따온 콩이다를 노래를 하며 밥을 먹었다.
가끔 TV에서 땅 투기와 치맛바람, 눈 가리고 아웅 심어 놓은 콩밭 이야기가 나오고서야 왜 콩밭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중에 이해를 하게 되었다. 가끔 땅 위로 흙산들이 만들어졌는데 한 겨울에 얼어버린 흙 산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장난을 치고 놀았다. 1988년 11월 중순에 잠실 롯데점의 영업이 시작되었으니 내 기억보다 더 오래 콩밭이었던 곳이었다. 허허벌판 넓은 그곳에서 우리가 쌓은 추억들도 많다. 콩밭 앞 아파트 쪽으로는 자전거를 빌려주는 아저씨가 시계가 없던 우리들에게 십분 남았다 오분 남았다를 알려 주셨고, 겨울에는 반대편 공터에 물을 뿌리고 천막을 두르면 엉터리 스케이트장이 되어 아이들이 입장료를 내고 실컷 놀 수 있었다.
세모난 작은 천막들에는 뽑기 아주머니들이 달콤한 설탕 냄새로 우리 주머니의 동전을 꺼내게 하셨고 달고나를 담은 국자는 몇 번을 우려먹어도 단맛이 났다.
롯데백화점 골조가 올라가고 지하로 내려가는 지하도를 내는 길에는 제약회사가 세워 놓은 소변통이 주르륵 서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길을 가던 남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고 소변통이 찰 때쯤 제약회사에서 통째로 가져갔는데 연구를 하거나 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약이 더럽다고 생각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먹기 싫은 약이 더 싫어져서 진저리를 쳤었다. 내가 먹은 약에는 오줌이 들어있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