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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Nov 29. 2022

청변풍경(廳邊風景)_02. 은전 한 닢짜리 여권.

  "나 여권 잃어버렸는디, 좀 새로 만들어줘."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성이 다짜고짜 내 쪽으로 와서 처음 건넨 말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내게 여권을 맡겨놓은 사람인 양 말하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욱 눈여겨보았다. 누렇게 바랜 티셔츠, 군복 느낌의 옷, 특유의 사투리, 살짝 풀린 눈, 움직일 때마다 휘청이는 몸, 마스크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진한 알코올 냄새까지... 그랬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나. 대낮에 구청에서 취객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메모장 좀 줘봐."


그는 내 앞에 앉으면서는 메모지를 찾았다. 나는 엉겁결에 손에 집히는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그는 너무 작다며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옆에서 눈치 빠른 선배가 A4 용지를 내어주었다. 흔쾌히 종이를 받아 든 그는 누구든 보란 듯이 큼지막하게 숫자를 적었다. 무엇인가 하니, 로또 번호다.     


   "이게 하느님한테 받은 번호야! 이게 된다니까!"     


이미 복권 용지에 출력된 숫자를 재차 베껴 적고는 아무렇게나 접어 주머니에 쿡, 쑤셔서 넣었다. 저러다 하느님께 점지받은 번호도 분실 신고해야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그는 다시 여권을 만들어 달란다. 휴, 이제 본론으로 들어온 건가. 나는 차근히 말씀드렸다.     


  "선생님, 먼저 분실 신고서를 작성해 주세요."

  "나 몰라, 적어줘."

  "선생님이 직접 적어주셔야 해요."

  "아따, 나 모르는데."     


그는 휘청거리면서 서식대로 걸어갔다. 예상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빈칸을 채우지 못한 채로 돌아왔다.


  "여기, 여기, 여기 모두 적어주셔야 해요."     


다소간의 시간을 보낸 뒤, 그는 서류 작성을 겨우 마쳤다. 서류를 받아 든 나는 그의 여권 발급 이력을 조회해 보았다. 살펴보니 이번 신고가 처음이 아니었다. 최근 5년 이내의 세 번째 분실. 이럴 경우, 유효기간은 2년으로 줄어든다. 불이익이 많은 상황이었기에 기존의 여권 유효기간이 만료된 후에(분실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될 때)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질문 하나를 했다.


  "선생님, 급히 어디 나가실 데가 있으세요?"

  "모르쥬, 한국이 싫어서 갈랑가."     


대답을 듣고 나니, 왠지 주제넘은 질문 같았다. 여권을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를 내가 일부러 꺾으려 한 건가. 방금 찍어온 사진도 내게 그런 생각일랑 접으라 말하는 것 같았다. 사진 속의 그가 군복 재킷을 입은 채로 기를 쓰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내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 접수를 진행했다. 그러다, 분실 신고서를 제출하려다 분실 사유를 읽게 되었다.


첫 번째 분실은 수첩을 꺼내다가.

두 번째 분실은 술을 마시다가.

세 번째 분실 역시 술을 마시다가.


문득 그에게 어떤 것이 더 빠를지 궁금해졌다. 새 여권에 찍힐 출국 도장 자국일까, 혹은 분실 신고서에 적힐 또 다른 분실 사유일까.




겨우 접수를 끝내고 대망의 결제의 순간이 왔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여권 수수료 결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돈 없는데, 받으러 올 때 낼게요."

  "선생님, 지금 결제하셔야 여권을 받으실 수 있어요."     


그는 귀찮은 듯이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꾸깃꾸깃한 지폐들이 그에게 안녕을 고하며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따, 하나, 두이, 서이, 너이... 자, 여기 있소!"     


나는 현금을 받고 나머지 과정을 설명해 드렸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안녕히 가세요, 인사했다.

 

  "수고하씨요!"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건너편의 직원이 들었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가슴에 뜨끈한 기운의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그가 그간의 나의 노력을 알아준 것 같았다. 무례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세상에서 그는 어쩌면 다정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보내고 나서는 한참 동안 피천득의 '은전 한 닢'을 떠올랐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과연, 그는 여권 한 개짜리 희망을 산 걸까, 절망을 쥔 걸까.




<토막 여권 정보>


여권은 분실 횟수에 따라 유효기간이 줄어들어요!

-5년 이내에 2번 분실 시 5년, 3번 분실 시 2년

-1년 이내 2회 분실 시 2년


분실된 여권은 인터폴 회원국에 전파되어 입국 심사 과정이 까다로워집니다!

분실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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