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아마 여기서 다른 가치관으로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리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모든 동물은 사랑을 한다. 물론, 내가 그것들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사랑을 하는지 예측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하지만, 그것들도 나름의 기준을 갖고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사랑이란 이성에게 느끼는 애타는 감정만 속한 것이 아니기에 사랑의 범주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가족에게 느끼는 편안함, 친구에게 느끼는 친근감 등이 이에 대한 예시에 해당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가장 결핍을 크게 느끼는 사랑은 어떠한 것일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로 적은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이성에게 느끼는 사랑의 결핍이 가장 클 것이라고 조심스레 의견을 던져본다. 물론, 가족과 친구로부터 얻는 사랑이 이성에게 받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그럼에도 우애, 가족애보다 이성에게 느끼는 연애의 감정을 우선하여 보는 이유는 가족과 친구에게 받는 것과는 약간의 상이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과 교우 관계를 형성하여 또 하나의 작은 사회를 형성하는 것. 그 안에 있는 누군가를 우리는 친구라고 부른다.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고, 슬픔을 위로하며, 가족 이외에 처음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 인물들이다. 사람은 그들 사이에서 자신들만의 규칙 안에서 성장하고, 몇 가지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며 교류한다. 즉, 가족 이외에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룹이라는 것이다. 이 안에서 느끼는 애정은 '사랑'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우정'에 가깝다. 물론, 커다란 범주에서 본다면 우정 역시 사랑의 일부겠지만, 이성에게 느끼는 호감과는 상이하기에 다른 것으로 치부하고자 한다. 최근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화두에 오르는 '여사친, 남사친' 관계가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우정과 사랑을 같은 것으로 보느냐 다른 것으로 보느냐에 대한 담론이 꾸준히 이어지는 것은 비슷한 결이지만 결코 다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친구가 없는 외로움은 애정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다소 소극적이고 여려지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필자는 이 우정을 가족과 사랑하는 이성으로부터 촉발되는 애정보다는 다소 후 순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란 혈연관계 즉, 나와 가장 관련성이 높은 이들의 집합체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살아가는 식구이다.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제 3자, 타인과는 완벽하게 구별되는 사회적 집단. 그렇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으며,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자면, 그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주었냐에 따라 어떠한 사랑을 하는지 갈린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랑을 주고받은 사람이라면, 타인과의 애정 관계에서도 그러한 능력이 표출될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부수적인 사랑이라는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환경적 요인의 가장 대표 격인 가족으로부터 얻는 사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정의 빈도가 점점 줄어든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를 지남에 따라 사람은 가족 (안)과의 상호작용보다는 친구 혹은 이성 (밖)과의 감정적 상호작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 직접 가정을 꾸리게 되고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족과의 사랑은 늘 곁에 있으면서도 늘 부족하다. 누군가는 충분히 신경 쓰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에 서운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이러한 측면에서만 본다면 가장 애처로운 사랑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사랑이라고 언급하면서 왜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이성으로부터 얻는 사랑인가?
가족, 친구에게 느끼는 애정과 달리 이성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는 호감. 이는 사실 굉장히 본능적인 것이다. 가장 본능적이기에 가장 우선순위로 배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이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묘한 이끌림, 애정이자 사랑은 사람을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이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유는 그러한 감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아'이다. 흔히 가족으로부터 얻는 사랑은 우리가 쉽게 깨닫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늘 받아왔고 신경을 크게 쓰지 않으며, 대게 항상 후순위로 배치하는 경향이 많다. '쭉 그래왔으니 이해해 주겠지, 괜찮겠지' 등으로 가족과의 사랑을 다소 업신여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허나, 가족이 아닌 타인, 그중에서도 연인으로서 느끼는 끌림과 애정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든다. 행동으로써의 적극적인 것뿐만은 아니다. 늘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함께 할 미래를 그리며 더욱 갈망하고 원한다. 가꾸지 않았던 자신을 바꿔가며 맞춰가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있으며, 마음을 얻기 위해 꾸준히 상호작용하고자 한다. 여기서 형성되는 '자아'는 굉장히 큰 영향을 행사한다. 노력하지 않고 사랑을 얻고자 할 때의 자아는 '오만'에 가까우며, 노력을 했음에도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는 '좌절' 및 '낙담'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는데, 왜 그 혹은 그녀를 날 사랑해주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곤 한다. 사랑의 실패에 따른 리스크는 결국 자신에 대한 화살로 이어진다. 자신이 부족하기에, 자신이 열등하기에라는 부정적 감정을 만들고 이는 앞으로 사랑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반대로 노력을 통해 사랑이 이어졌을 경우 '행복'과 '여유'를 얻게 된다. 흔히들 연인이 있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인다고 표현한다. 사랑하는 이가 있고 돌아갈 곳이 있기에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필자는 여유가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쟁취하고 성취한 경험이 있기에 자신에 대한 기대치와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 이는 여유로 이어지며 조급하고 불안하게 사랑하지 않는 자아를 형성해 준다. 성공을 맛보았기에 실패해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상황적 여유나 다른 이유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드러난다. 즉, 애정적 빈부격차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연인과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개선하고, 인정하고자 한다. 반대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사랑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며 회피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연인, 즉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얻는 사랑은 사람 자체를 가장 많이 좌우한다는 것이다. 가족과 친구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한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살아가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소 표현이 과격해 보일 수 있으나, 그 어떠한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조용히 천천히 자신을 갉아먹으며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다른 동물과의 가장 큰 차이는 -물론 언어 구사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사회성이라고 생각한다.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리를 짓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집단을 이루는 것. 그 안에서 성장하고 진정한 자신을 가꾸어나가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대한 호감을 느끼고 애정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한다는 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그렇기에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하고 있어?"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잘 살아가고 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은 잘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잘 사랑하고 있는지 조심스레 의견을 던져본다. 누군가에게 상처 입지는 않았는지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는지. 사랑이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하기에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순 없는지. 개개인마다 내놓은 답변을 다 다르겠지만, 오늘도 그대들이 잘 살아가고 있기를 바라며 이만 말을 줄여보고자 한다.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대들의 내일은 누구보다 사랑받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