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워한 그들. 그들도 나를 그리워하고 사랑한 걸까?
새색시인데 눈이 퉁퉁 부어있다. 쌍꺼풀이 없지만 또렷하고 큰 눈은 울어서인지 조금 처져 있다. 흑백이라 치마저고리의 색깔은 알 수가 없다. 밝은 흰색으로 보일 뿐이다. 그 옆에 있는 신랑은 싱글벙글 웃고 있다. 잘 생겼다. 흑백이지만 원 색도 까만색이었을 것이다. 깔끔하고 맵시 있게 맞춰진 정장은 신랑을 더 멋있게 꾸며준다. 앞뒤로 두줄 양가 친척들이 빼곡히 서있다. 유일하게 엄마가 북한에서 가지고 온 사진이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진이다. 영정 사진까지는 아니지만 아빠 얼굴만 확대한 사진이 갖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온다. 무작정 이 오래되고 낡은 흑백사진을 가지고 학교 근처 사진관으로 갔다. 여기 이 신랑 얼굴만 확대해서 액자 만들어 주세요. 화질 개선까지 해서 탁상에 놓고 보기 좋은 크기로 만들어 주신다. 돈은... 하나원을 나온 이후로 쭉 엄마와 분리해서 관리를 해왔다. 항상 용돈은 떨어지지 않을 만큼 있는 편이다. 나라의 수급비를 받아 생활하는데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아빠 사진 만들 만큼의 여유는 충분히 있다.
다 만든 아빠 사진 들고 기숙사에 들어와서 책상에 놓고 한참을 울었다. 이제 늘 볼 수 있어서 좋다. 항상 나를 보며 웃고 있다.
..........
아빠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아빠 보고 싶어서 분명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빠가 웃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내 눈앞에 저기서 아빠가 웃고 있다. 아빠한테로 가야 한다. 그런데 걸음이 떼어지지가 않는다. 안간힘을 다 써도 발이 떼지지가 않는다. 손을 내 뻗어 보는데 손이 닿지 않는다. 아빠는 웃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아빠 아빠 소리치고 싶은데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아빠 아빠. 가슴이 터지게 마음으로 목메부른다. 아빠 아빠 아빠......
공부해야 하는데. 시험 망치면 안 되는데. 근심을 하다가 보니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보고 싶은 아빠가 꿈에 와줘서 얼마나 좋은지. 아빠가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매번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꿈에 찾아오는 아빠가 얼마나 고마운지.
갑자기 그날이 불현듯 생각난다. 학교 졸업반 때 한창 다들 군대 간다고 날마다 시끌벅적 놀러 다니던 때 말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유영광 그 아이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때다. 그 아이의 빈자리를 다들 느껴서일까? 다른 남학생들이 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 아이 말고 다른 아이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꿨다.
아랫동네에서부터 그 아이, 유영광이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올라온다는 것이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 문 앞까지 왔다. 그리고 밖에서 소리가 들린다.
"금이 누나!"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사람 있니?"
"내가 나가 볼게."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인걸 알아챘다. 당황스러운 내 몸짓과 얼굴 표정을 애써 숨기며 대문까지 나간다.
"어떻게 왔어?"
"나와 봐!"
"오래 있을 수 없어. 아빠 엄마가 의심해"
"나 너랑 약혼해야겠어!"
"응?"
"약혼. 나 군대 나가면 다른 남자들이 너를 욕심 낼 거잖아"
"나 기다릴 수 있어"
"아니야. 약혼하고 가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맹꽁이 같이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서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내심 마음이 좋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고백이다.
그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우리 엄마 아빠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아버님, 어머님, 저 금이랑 약혼하게 해 주세요"
엄마, 아빠는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몰라 당황해한다.
"저 이번에 군대 나갑니다. 금이가 제가 군대 갔다 올 때까지 기다려준다지만 다른 남자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 같아서요."
엄마, 아빠는 아무 말이 없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좋다 싫다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이 없다. 답답하다.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제발~
그리고 잠에서 깼다.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야속하고 속상했다. 그날 학교에 갔는데 맨날 등교 일분 전에 나오던 유영광, 그 아이가 일찍 나와 있다. 어제 일은 분명 꿈이었는데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너 요새 이상한 생각 하지? 이상한 생각하지 마!"
이 말을 하고 사라진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꿈속에 진짜 왔다 간 거야 뭐야? 내가 뭐 어쨌다고. 근데 그 눈빛이 내 꿈을 다 확 꿰고 있는 느낌이다. 설마 나와 똑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겠지.
커플들은 다들 난리도 아니다. 남자들이 군대 나가기 전에 시계를 사주며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 아이가 와서 시계를 채워주며 기다려 달라고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찬바람만 쌩쌩 불어댄다. 여자 자존심 그런 거 다 버리고 어떻게 서든 매달리고 싶다. 누구든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학교 옆 마을에 사는 오광성이가 학급을 초대했다. 떡이며 반찬이며 국수며 너무 맛있는 상을 차려 놓았다. 다들 맛있게 먹고 놀 준비를 하는데 누가 내 옆구리를 찌른다. 그 아이다. 밖으로 따라 나오라고 눈짓한다. 남들 눈치안채게 몰래 따라나갔다. 어찌가 캄캄한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쪽 하교 울타리 안쪽에서 전짓불이 반짝 거린다. 그 아이인 게 틀림없다.
"어떻게 불렀어?"
"나한테 뭐 줄게 있다며?"
"내가? 아 맞다."
여자들이 군대 나가는 남학생들 한 명씩 맡아서 편지도 써주고 선물도 하기로 했다. 그걸 내가 짰고 나는 내가 그 아이를 맡겠다고 했다. 다행히도 유감 있는 다른 여학생은 없었다.
"근데 오늘 안 가져왔는데"
"그건 그 거구. 너 왜 내가 싫어?"
"나 싫다고 한적 없는데?"
"그럼 왜 저번에 사진 찍으러 가자고 했는데 안 간다고 했어?"
"그건... 부모님들이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고, 무서워서......"
"그래서 넌 안 되는 거야."
아무 말을 못 했다. 나는 아빠, 엄마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항상 겁이 났고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보통 그런 용기가 다 있었나 보다.
"우리가 잘 됐어도 어치피 우린 안 됐을 운명이야. 나도 외동아들이라 우리 엄마 모셔야 하고, 너도 외동딸이라 아빠 엄마 모셔야 할게 아니야. 어떻게 두 부모 다 모셔? 그래서 어차피 우린 안 되는 사이였어."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나기만 해 봐라 하고 몇 날 며칠을 만날 날 만 기다렸는데 온통 얼어버려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선생님이 사진사를 불렀다.
"손금이!"
다들 나를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찍자!"
나는 오늘따라 한국몽신도 안 신고 왔어 볼 품 없는데. 옆에 최정옥이가 나기 한국몽신을 빌려준다. 남의 구두를 빌려 신고 그 아이 옆으로 간다. 그런데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간다. 어제는 우리가 안 되는 사이라더니. 요새 소문에 옆 동네 시내 아가씨들 친하고 다닌다던데. 갑자기 뭔 생각인 거야. 내가 쉬운 거야 뭐야?
아무튼 그 아이 옆에 가서 섰다. 사진사가 앞에서 사인을 준다. 근데 갑자기 손을 내 어깨에 올린다. 당황한 나머지, 수만 가지 생각을 하느라 사진을 찍은 타이밍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촬영 시간이 끝나 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남자애들도 용기를 내서 쌍쌍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단체사진까지 찍고 나서 선생님들부터 시작해서 학생들 사이에서 수군수군 난리도 아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아닌 척, 겨우 찍어주는 척했지만 조금 마음이 다시 설레기도 한다.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있긴 했으나 진짜로 좋아한 건 나인 걸까?
며칠 뒤 사진이 나온 모양이다. 남자들 사이에서 서로마다 사진을 들고 다닌다. 혹시나 해서 나도 담임선생님 댁에 사진 찾으러 갔다. 선생님 말이 유영광 그 아이가 내가 자기에게 찾아가게 안다며 사진 값을 내고 두장 다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 인상이 더 안 좋아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은 동네 남학생이 하는 말이 마지막 사진인에 마음에 안 들더라도 잘 좀 찍어주지 그런다. 내 표정이 안 좋게 나왔나 보다. 나는 사실 그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데.
그 이후 유영광 그 아이는 더 나와 멀어졌고 군대 가는 날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버렸었다. 내가 표현이 명확하지 않아서 그래서였을까...
시작인 줄 알았는데... 대학교에서의 첫 애정. 그것도 가버렸다.
카톡이 하나와 있다.
"금이야, 이번 방학에 우리 교회 청소년부 수련회에서 간증해 줄 수 있어? 전도사님한테 너 간증 말씀드렸더니 청소년들한테 도전이 될 것 같다고 하시네"
어떻게 답해야 하지? 신앙과 사생활은 별개이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 그렇게 전도사님한테 말씀드려 놓을게"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간다. 끝없이 넓고 큰 바다가 방파제를 넘어설 것처럼 파도를 쳐대지만 마을 덮치지 못하는 것은 나름의 계획과 규칙이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규칙과 계획들, 그것들이 나와 상관이 있을까? 내가 계획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일들과 시간이들이 마구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