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피로 물든 천추대연

by 밤톨맘

부다시리라고 주장하는 저 계집은, 명백히 가짜다. 나는 확신했다. 그 계집은 내 손으로, 내가 직접 죽였으니까. 그녀가 내 목에 남긴 마지막 상처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아릿한 흉터가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그저 어린 날의 장난이었다. 나는 그녀가 금방 구해질 줄 알았다. 여름날이라 강물이 그렇게 불었는지, 어린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그저… 그저 장난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이르테무르 집안과 제법 가깝게 지냈다. 고려로 함께 떠난 여행. 그날은 압록강변 풍광을 어머니와 단둘이 즐길 수 있는 내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바스비쉬, 그 계집이 따라나서겠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다 그녀가 자초한 일이다.


어린 시절,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혼란스러워 어머니가 계시는 궁에서 자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권신 바얀에게 나를 맡겼다. 나는 몸을 숙이며 황실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버틴 것이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건만, 궁중의 예법이며, 태자 교육이며…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리도 적단 말인가. 하필 어머니와 나와 단둘이 함께하는, 간신히 얻어낸 그 귀한 시간을 그 계집이 모두 망쳐버린 것이다.


강물이 매섭게 흐르는 다리 앞에서, 궁녀와 환관들이 풍경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부다시리는 끊임없이 재잘재잘, 조잘조잘거렸다. 어머니와 단둘의 오붓한 시간을 기대했건만. 부다시리가 모조리 앗아갔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의 손이 먼저 나갔다. 가차 없이 바스비쉬를 강물로 밀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팔을 휘젓는 순간, 새빨간 손톱이 나의 목 살점을 깊게도 파고들었다.


태황태후이자 나의 어머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샤카이 환관에게 서늘한 명을 내렸다. 사건을 목격한 모든 궁녀와 환관들을 그 자리에서,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그녀는 진실을 완벽하게 은폐했다. 어머니는 베이르테무르 위왕에게 부다시리가 저잣거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교묘하게 거짓말했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였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끊임없이 되뇌며 어린 나에게도 이 진실을 영원히 함구해야 함을 매섭게 각인시켰다. 내 눈앞에서 피를 튀기며 죽어가던 이들의 비명… 그날 이후, 그 끔찍한 핏빛 잔상이 온몸을 갉아먹으며 끝없이 나를 죄어왔다.


그러니 지금 부다시리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명백히 가짜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그녀에게서 죽은 부다시리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일까. 그녀가 등장한 이후부터 꿈마다 부다시리가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축축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 귓전을 찢는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하하, 내가 그녀에게 칼날을 들이댈 생각을 하다니. 하늘이 내게 내린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제대로, 철저히 죽이라는 신의 계시!


아니, 아니… 그녀는 부다시리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어째서… 부다시리의 어릴 적 이름, 바스비쉬를 알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 계집이 가지고 있던 반지는 옹기라트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황실 반지임이 분명했다. 나는 반지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즉시 알아차렸다. 헌데 어째서 그녀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나에게 복수하려고, 정녕 살아서 돌아온 것인가? 그 계집의 눈빛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건방진 눈빛. 그 년은 분명 이로운인데… 아니면 그 년이 정녕 부다시리인 것인가? 이제 정말 내가 미쳐가는 것인가.


어머니는 테곤 테무르를 끌어내릴 생각으로 군영물자와 무기를 은닉하며 치밀하게 준비해 가고 있었다. 어머니도 부다시리가 가짜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를 미끼 삼아 테곤 테무르는 물론, 눈엣가시였던 카이두 집안까지 뿌리째 몰살할 계획이다. 어머니는 이로운의 친 오라버니, 이태평을 직접 찾아내 환관으로 만들 만큼 철저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황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일 있을 천추대연에서 황제의 보위는 나로 바뀔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황태자가 아니라 머지않아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원나라의 황실 고위 관리들이 모두 모인 그 자리에서, 이태평이 이로운의 정체를, 그녀에 얽힌 모든 진실을 폭로할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에 든 이 위조문서가 모든 것을 끝장낼 것이었다.


이 문서에는 테곤 테무르가 황태자인 나를 폐위시키기 위해, 베이르테무르 위왕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고, 그의 진짜 딸이 아닌 '이로운'을 부다시리 공주로 둔갑시키는 것을 최종 승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 테곤 테무르는 물론, 그와 손잡은 카이두 집안까지 잔인하게 몰락될 것이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내일 내가 황제가 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부다시리부터 죽일 것이다. 아니, 부다시리가 아니지 않느냐. 이로운부터 처리할 것이다. 그리고 차례대로 카이두, 테곤 테무르까지, 내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이다.


오늘만큼은 술을 멀리해야겠다. 술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 더는 마시면 아니 되었다. 내일은 이 거대한 음모의 대서막을 여는 날이 아니겠는가. 한 치의 오차도 없으려면 오늘 이쯤에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 가장 나았다. 나는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침상에 몸을 뉘었다.




대도의 가을밤, 어둠을 삼킨 듯한 웅장하고 현란한 불빛이 황궁을 휘감았다.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과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천추대연이 마침내 장엄한 막을 올린 것이다. 황궁 중심부에 지어진 거대한 연회장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겹겹이 이어진 처마 끝에는 대형 등롱이 빽빽하게 걸려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휘장이 바람에 나부끼자 수놓아진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듯했고, 황금기둥들은 연회장을 지탱하며 제국의 위엄을 과시했다.


연회장 안은 오색찬란한 인파로 거대한 만화경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 황좌에는 용포를 입은 황제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좌우로 황후들과 대신들이 줄지어 자리를 채웠다. 원나라의 황실 고위 관리들은 물론, 광대한 제국의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제후국의 왕들이 자신들의 가장 화려한 복식을 차려입고 참석했다.

웅장한 북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우더니, 정면에 마련된 드넓은 무대 위에서 황실 악사들과 무용수들이 황홀한 공연을 펼쳐냈다. 거친 야성미를 뿜어내는 몽골 전사들의 춤이 절정에 달하자, 이내 선이 고운 무희들이 나비처럼 아련한 날갯짓으로 궁중 무용을 선보였다.


곳곳에 마련된 거대한 황금 쟁반 위에는 세상의 모든 진귀한 음식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육즙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양고기, 향신료 향이 그윽한 이색적인 만두, 갖가지 빛깔의 과일과 달콤한 후식들이 황실의 끝없는 부유함을 대변했다. 향긋한 마유주와 붉은 포도주가 잔마다 아낌없이 채워지며 넘실거렸고, 흥겹게 부딪치는 잔 소리에 환호와 웃음이 뒤섞여 연회장의 열기를 더했다.


이 천추대연은 단순한 잔치를 넘어, 원나라 제국의 절대적인 권위와 광활한 영토를 과시하는 거대한 정치적 의례 그 자체였다. 이 자리에 선 모든 이들은, 황제의 한마디에 천지를 움직이는 제국의 압도적인 힘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오늘인 것인가? 근래 들어, 나는 크고 작은 잔치나 연회가 있을 때마다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태평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거대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내 시선은 연회장 한쪽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황태자 엘 테구스를 향했다. 그는 바닥만 응시한 채, 눈앞에 놓인 술잔을 차마 들지 못하고 불안하게 매만질 뿐이었다. 평소 그토록 즐기던 술까지 마다하다니. 분명 오늘인 것이다. 나는 그를 자극해야 함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때였다. 에르덴 언니와 나란히 서 있는 내게 바야르가 다가오더니 고소하다는 듯 속삭였다.

“카이두 장군님과 같이 있는 모습을 요즘은 도통 볼 수가 없구나. 그새 사이가 나빠진 게야? 그럼 그렇지. 하찮은 고려 여인이 어디가 좋다고! 잠깐 정신이 해까닥 하신 게지.”

바야르는 얄밉게 웃어 보였다.


“고려 여인이라니! 부다시리는 우리 동생이야. 바야르,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는 자리니 자중해.”

에르덴 언니가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제지하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번에도 에르덴 언니가 막아섰지만, 바야르의 눈빛에는 여전히 나의 신분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했다.


“내가 뭐? 언니는 쟤 의심스럽지도 않아? 부다시리는 말할 때마다 머리를 귀 뒤로 그렇게 넘겨댔는데 쟤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

순간, 나의 머리에서는 땡! 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어릴 때 예쁜 척한다고 하도 놀림을 받아서요. 당연히 고쳤죠.”

나는 바야르의 어이없는 시선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 시선을 뚫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겨 곧장 연회장 안쪽으로 향했다. 위태롭게 앉아 있는 엘 테구스의 맞은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으려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그의 불안한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붉은 비단 저고리 위로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한 줄을 귀 뒤로 매끄럽게 쓸어 넘겼다. 오만하고 태연한, 그러면서도 조롱 섞인 도발적인 몸짓이었다.


엘 테구스는 애써 나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듯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나의 눈은 집요하게 그의 불안한 눈동자를 쫓아갔고, 결국 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처럼 부딪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목으로 털어 넣었다.


드디어, 반응이 온 것이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술병을 통째로 그러쥐고 거침없이 목으로 들이붓기 시작했다. 주위의 웅성거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의 절박하고 무모한 움직임은 연회장의 뭇시선을 집중시켰다.


“여기 술이… 떨어졌느니라! 술을… 술을 더 가져오너라!”

엘 테구스의 이성이 점점 마비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보란 듯이 머리카락 한 줄을 귀 뒤로 한번 더 넘긴 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에게 일침을 가했다.


“네 죄를 알리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다시 선 것이다.”


크아아앙!

순간, 그의 목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이 연회장을 뒤흔들었다. 공간을 채우던 음악은 거짓말처럼 멎었고,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소리는 싸늘하게 굳었다. 광기 어린 그의 행동으로 연회장은 삽시간에 고요 속으로 잠겨버렸다. 태황태후가 엘 테구스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엘 테구스! 정신 차리거라!"라고 연신 외쳤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광기에 휘둘릴 뿐이었다.


엘 테구스는 진열된 술잔과 진귀한 도자기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날뛰는 그의 팔다리는 값비싼 보물들을 사정없이 후려쳐 깨뜨렸다. 쨍그랑! 와장창!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찢으며 밤의 연회장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그는 격렬하게 소리치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나를 죽일 듯이, 시퍼렇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 속을 보니, 그는 나에게서 부다시리의 환영이 다시 보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날 밤처럼 말이다.


“꺄아아아아아악! 정녕 네가… 네가 부다시리더냐?!”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옷깃을 찢듯 풀어헤치며 목에 난 상처를 필사적으로 드러냈다. 오열하며 나의 손을 제 목에 거칠게 잡아끌었다. 나는 그 힘의 반동으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리 살아 있었다면… 내가 그리 죄책감 갖지 않았어도 됐을 것인데, 흑흑흑. 이 상처… 보이느냐? 네가… 네가 내 목에 남긴 상처이지 않느냐?!”

그의 목에 깊게 파인 흉터. 그것은 오랜 세월 그를 옥죄어온 고통이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었다.


“너는… 너는 기필코 다시 내 칼에 죽어 마땅하다! 네가 내 목에 남긴 상처처럼… 너의 목을 베어주겠노라!”


엘 테구스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나를 일으켜 세우며 두 세발 멀어지더니 단검을 뽑아 들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나에게 돌진하려는 순간, 카이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듯,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탁자 위로 뛰어들었다.


엘 테구스의 칼을 막아서려는 찰나, 나는 그보다 더 빠르게 엘 테구스의 품 안으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려면, 이보다 더 큰 자극은 없으리라. 나의 붉은 피가 그를 벼랑 끝으로 처참하게 몰아갈 것이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점을 파고들었고,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는 나의 피 냄새를 맡으며 기이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 같은 웃음 속에서, ‘부다시리!’ 라는 이름이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그는 실성한 듯 슬픔이 뒤섞인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내가 너를… 너를 강가에 민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진실을 은폐하려고 궁녀와 환관을 무자비하게 죽인 것이다! 그러니 나의 잘못은 없지 않느냐?”

엘 테구스의 광기와 함께 터져 나온 충격적인 고백으로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이 일제히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모든 죄는 결국, 자신의 입으로 고발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태황태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모든 핏기가 사라졌고, 이태평의 얼굴에는 경악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의 거대하고 치밀했던 모든 계획은, 시작도 전에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다.


“허나… 너도… 내게 아픔을 주지 않았느냐!”

부서질 듯 움켜쥔 내 어깨 위로, 점점 더 깊게 파고드는 그의 힘이 느껴졌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태평이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폭로했다면, 나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죽음으로 카이두를 살릴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다행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마지막이 될 그의 얼굴인데 눈앞이 자꾸만 흐려져 속상했다.


어차피 가짜 인생이었다. 덤으로 살고 있는 삶일 뿐이었다. 숙영지에서 인간의 존엄이 무참히 짓밟혔던 그날, 카이두는 나를 공주로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음을. 애초에 삶에 욕심낸 적이 없는 나니까.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을 믿지 않은 나니까. 헌데 샛노란 국화꽃을 잔뜩 보고 온 그날 밤. 국화꽃처럼 따스하고도 밝은 온기가 내 인생에도 가득 차길 바랐던 탓일까. 아마 나는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살고 싶었다. 처음이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사람. 비록 가짜 신분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그와 함께한 날들이 참으로 행복했었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이제 곧 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다.


이얍!

엘 테구스의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갈랐다. 바로 그때였다. 황궁 밖,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군대가 황궁을 향해 물밀듯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엘 테구스의 폭주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태황태후의 사전 계획으로 이미 황궁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완벽하고도 치밀한 반역이었다.


이태평의 눈은 재빠르게 상황을 읽어내고 있었다. 자신들의 모든 계략이 허망하게 무너졌음을 직감한 얼굴이었다. 황궁은 머지않아 피의 숙청이 시작될 참이었다. 엘 테구스의 뒤를 봐주던 세력도, 태황태후를 따르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군중 속에 섞여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테곤 테무르 폐하의 지시로, 연회장 뒤쪽에서 숨어있던 황실 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카이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이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활을 들어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쉬이이익-

화살이 연회장의 소란을 찢고 지나갔다. 과녁은 정확히 엘 테구스의 오른팔이었다.

퍼억-!

화살이 살점을 꿰뚫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엘 테구스가 괴성을 내며 쓰러졌다. 덕분에 나는 그가 무지막지하게 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이미 황실 안은 칼부림이 시작된 뒤였다. 그러나 카이두 장군이 이끄는 정예 군사들은 모든 것을 빠르고 정확하게 제압해 나갔다. 혼란은 빠른 시간 안에 잠재워졌다.


그리고 폐하의 근엄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서늘하게 갈랐다.

“황실의 위엄과 국본을 흔든 죄, 만천하가 지켜보는 앞에서 단죄하리라! 태황태후와 황태자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즉시 유배에 처하라!"

폐하는 그다음 시선을 나에게 돌리며 근엄하게 물었다.


“죽었다는 부다시리가 어찌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궁 안에는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막아서려는 카이두에게 안심하라는 고갯짓을 한 뒤, 다음 말을 준비했다.


“저는 제 부모님을 친 부모님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너무 어릴 때 기억이라 잘 나지 않았으나,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잊혔던 저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양부모님께서 나누시던 대화를 떠오르게 되었지요. 강변에 누워있던 저를 발견하고 겨우 살려내 기르셨다는 말을 기억해 냈습니다.”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잔혹한 진실의 조각들이 비로소 황제의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듯했다. 폐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한 표정. 실종 사건이, 사실은 끔찍한 살인 사건이었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은폐하려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까지.


엘 테구스가 광기를 부리며 난동을 부리던 그날 밤, 그가 부다시리를 강에서 밀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이성을 잃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이야기였다. 어쩌면 부다시리의 영혼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이 땅을 다시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은 나를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공주가… 친부모를 잃은 것도 모잘라, 살해당할 뻔했고, 심지어 그 진실이 은폐되기까지…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폐하, 의원을 불러주십시오. 공주님의 목에서 피가 많이 흐릅니다.”

카이두의 차분하지만 간절한 목소리가 연회장 안을 울렸다. 폐하는 그제야 내가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 머리에 들어온 듯했다. 그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네 말이 맞다! 어서 부다시리 공주를 모시거라! 의원을 불러 극진히 모시도록 하거라!”




그날 밤, 카이두는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나 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의 불안한 눈동자가 나를 감싸 안았다.


“화가 단단히 나셔서 저를 영영 찾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번민 가득한 얼굴로 일그러졌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고, 당신 또한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힐지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이 길어질수록 당신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참 무겁더이다.”

그의 진심이 담긴 나직한 음성에 내 가슴이 참으로 아팠다.


“이해할 수 없다 한들, 당신에게 향하는 제 마음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중양절 밤, 기억나십니까? 참 많이도 웃으셨죠. 저는 당신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적도, 기대한 적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참 예뻤습니다. 그날 당신의 웃음을 제가 꼭 지켜드리겠다 다짐하게 되었지요.”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지만 이내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참 무모했습니다. 하마터면 당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당신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다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앞으로 웃을 날이 많아지겠습니까? 당신의 말과 행동은… 참 모순입니다.”


“당신이 날 찾지 않으시니 황실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생각했습니다. 폐하의 명이 많으시구나 하며 저 혼자 또 정신승리했지요. 하루빨리 부다시리 공주의 사건 전말이 밝혀지면, 당신이 한숨 돌릴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전보다 한가해져 저를 찾지 않으실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오시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그가 짧게 탄식했다.


"그렇다고 목숨을 내놓습니까? 왜… 왜 저를 막아섰습니까? 당신이 다치지 않고도 그 자를 끌어낼 명분은 충분했습니다!”

“제가 목숨을 내놓다니요?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저 엘 테구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함이었지요. 보십시오. 당신이 저를 또 구해내지 않았습니까?”

그의 얼굴에는 짙은 원망이 그림자처럼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어둠에 정면으로 맞서듯, 활짝 웃어 그를 비추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내놓으려고 했던 것을 제가 모르는 줄 아십니까?”

“정말입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저는 아직 환자입니다. 목에 이리 큰 상처까지 입지 않았습니까?”

나는 능청스럽게 목에 난 상처를 가리켰다. 그는 헝겊이 덮인 내 목에 시선이 닿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풀었다.

“기억하십시오. 저는 이제 당신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는 무모하게 뛰어들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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