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활 끝에 머문 그 너머의 것

by 밤톨맘

요란한 격변이 지나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엘 테구스 황태자가 폐위되자, 테곤 테무르 황제는 거칠 것 없는 기세로 제국의 모든 권력을 굳건히 장악했다. 그는 의붓형이 아닌, 기황후가 낳은 아유시리다르,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울 수 있으리라 확신한 얼굴이었다. 물론 기황후가 고려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치겠지만, 테곤 테무르를 막을 자는 더 이상 없어 보였다. 어린 아유시리다르의 황태자 책봉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황제는 이번 겨울 사냥 원정 대회를 평소보다 월등히 성대하게 개최할 것을 명했다.


새하얀 눈이 온통 뒤덮은 겨울 훈련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강렬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지만, 입김이 하얗게 흩어질 만큼 매서운 추위였다.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오늘은 활쏘기 연습이 있는 날. 곧 있을 사냥 원정 대회에서 최소한의 성적이라도 거두기 위해서 열심히 임했다. 카이두의 지시에 따라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추운 겨울 날씨에 손은 이내 빨갛게 얼어붙었고, 활은 자꾸만 제멋대로 비틀거렸다.


온 신경을 집중해 과녁을 겨냥했건만, 손끝을 떠난 화살은 맥없이 날아가, 팅- 하는 소리와 함께 과녁을 튕겨내기 일쑤였다. 왜 번번이 이리도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활시위를 완전히 당겨내기에는 얼어버린 손 때문에 힘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리기 시작했다.


“과녁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더니 순간, 알 수 없는 열기가 나를 감쌌다. 카이두는 내 등 뒤로 한 발짝 더 바싹 다가섰다. 그의 단단한 몸이 내 등을 지지하듯 기댈 때, 낯선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과녁의 정중앙을 보되, 그 너머까지 꿰뚫어 볼 듯이 노려 보아야 합니다. 활시위는 팔의 힘이 아닌, 온몸의 힘으로 끌어당기십시오. 힘이 실리지 않은 화살은 결코 과녁에 상흔을 남길 수 없습니다.”

그의 손이 내 팔꿈치부터 어깨, 허리까지 조심스레 포개지듯 닿았다. 얼었던 팔을 타고 따스한 기운이 번져나갔고,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따뜻한 숨결에 내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당신은 목표를 정확히 보지만, 때로는 그 표면에만 머뭅니다. 화살이 박히는 깊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과녁을 꿰뚫어 상처를 남기고 싶다면, 그 너머의 허공까지 생각하고 쏘아야 합니다. 온몸의 기운을 화살 끝에 모으고, 당신의 활을 뼈에 새기듯이 쏘십시오.”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과녁, 오직 과녁만 바라보았다. 그의 지시대로 과녁을 넘어 그 너머의 허공까지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온몸의 신경이 활과 과녁에 집중되는 순간, 손끝을 떠난 화살이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쉬이이잉-!

턱-!


이번에는 화살이 튕겨 나가지 않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과녁 한가운데 깊숙이 박혔다. 예상치 못한 성공에 나도 모르게 벅찬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를 돌아보자, 그의 눈빛에는 기특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따스하게 번졌다.


“제가 힘이 좀 딸려서 그렇지, 활은 잘 쏩니다.”

내 능청스러운 말에 카이두의 미소가 깊어졌다.


“힘이 딸린 것이 아닙니다. 그 너머까지 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활솜씨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이지요. 당신은 사물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지만, 그 너머의 결괏값은 전혀 고려하지 않더군요.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쏘아 올린 화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지난 천추대연에서 무모했던 나를 상기시키듯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의 시선과 이야기는 언제나 그 사건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참으로 집요했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십시오!”

나는 심통이 나 활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무슨 짓입니까? 사냥터에서 활을 내다 버리다니요? 참으로 무모합니다. 당장 활을 줍습니다. 실시.”


“제가… 제가 장군님이 거느리는 병사입니까? ‘실시’라니요? 그리고 다시는 무모하지 않겠다고 그리 말씀드렸거늘, 매번 모든 상황을 이리 한 방향으로만 대입하십니까?”

나는 비뚤어진 말로 대꾸했지만, 그의 매서운 눈초리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활을 주워 들었다.

내가 활을 줍자 그는 이제야 노여움이 풀리는지 너그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뿔이 나 있으시면서 활은 왜 다시 줍습니까?”

“장군님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요. 사냥터에서 활을 버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니까요.”

나는 작게 툴툴거렸다.

“하하, 그래도 활솜씨가 제법입니다.”


그는 짧은 칭찬을 건넸지만, 그의 눈빛은 칭찬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이어진 그의 시선은 천천히 내 어깨에 얹힌 눈송이로 향했고, 섬세한 손끝으로 가볍게 그것을 털어냈다. 닿을 듯 말 듯한 그 아주 작은 스침에도 내 뺨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어쨌든… 이 정도 실력이면 사냥대회에서 장군님께 폐를 끼치진 않겠죠?”

내 말에 그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휘어졌다. 따스한 눈웃음이었다.

“당신이 이 활을 즐기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온기 어린 눈빛은, 차디찬 겨울 세상마저 황홀한 꿈처럼 일렁이게 만들었다.



연경 한편에 자리한 베이르테무르 위왕의 저택은 번잡한 황궁과는 달리 고즈넉한 평화로움이 감돌았다. 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었던 가을 장미는 고개를 떨군 채,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땅에는 생명을 다한 듯 검붉게 변한 꽃잎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오늘은 고려의 왕이 될 사람, 왕기가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오는 날이었다. 일찍이 나는 언니들과 함께 그를 맞이할 준비를 도왔다. 에르덴 언니는 이미 대문 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왕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훤칠한 사내가 잔뜩 긴장된 얼굴로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왕기였다.


"강릉대군,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평소에는 늘 무겁게 고개를 떨구고 있던 왕기였지만, 에르덴 언니의 온화한 목소리에 그의 굳었던 표정이 희미하게 풀리는 것이 보였다. 에르덴 언니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아 이끌었다. 작은 접촉에도 그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저택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버지는 다정한 미소로 그를 맞아주었다. 고풍스러운 기물들로 가득한 객실 안에는, 고소한 소금차와 달콤한 과일 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왕기는 기황후 앞에서는 차마 펼치지 못했던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누었다. 고려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무르익는 동안, 그의 눈빛은 어느새 생기가 돌았다. 그는 황궁에서 보았던 무기력한 사내가 더이상 아니었다. 마치 봉인되었던 그의 잠재력을 하나씩 꺼내 보이는 듯했다.


식사가 이어지고, 아버지는 그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시며 쉴 새 없이 여러가지 음식을 권하셨다. 에르덴 언니는 왕기 옆에 앉아, 그의 수줍은 반응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눈길 속에서 서로를 향한 진심이 느껴졌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이 될 것 같았다.


화기애애했던 대화는 어느새 다가오는 겨울 사냥 원정대회 이야기로 이어졌다. 왕기 또한 우리와 함께 동행할 참이었다. 사냥대회는 분명 황궁의 차가운 기운을 잠시 잊게 할 만큼 뜨겁고, 즐거운 축제가 될 터였다. 그렇게 우리의 겨울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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