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고려왕과 첫 대면

by 밤톨맘

어느 화창한 오후, 흥성궁 문턱에 섰다. 서역에서 온 신비로운 향나무 조각이 은은히 사위어 들어갔다. 그윽한 이국적 향취가 기황후의 처소를 가득 메웠다. 태평성대가 따로 없었다.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했지만, 이 황실만큼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비껴선 듯, 잔치와 향락에 취해 있었다.


나는 예를 갖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고려복을 차려입은 기황후의 자태는 고고했다.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과 함께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내 오늘 공주를 부른 이유는 우리가 ‘고려’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 아니겠더이까?”

기황후의 옆에는 케식(황제 친위대)으로 연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고려의 왕족, '왕기'라는 사내가 서 있었다. 에르덴 언니에게 들었던'고려의 새로운 왕'이 될 인물이었다. '고려'라는 공통점은 있었으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속내는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침묵하며 기황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본디 고려 출신이라, 고향 땅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허나 황궁에는 예법이 있는 법. 부족한 것을 채우고, 미천한 것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 황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러니 고려의 미천하고 어린 처자들이 황실에서 더욱 기품을 배우고, 나아가 대륙의 안정을 돕는 데 기여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오. 그리하면 원 대국에서도 고려의 왕을 더욱 신뢰할 것이오.”


그녀의 시선은 잠시 내게 머물렀다. 자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것은 고려에서 공녀를 더 바치라는 완곡한 협박이었다. 수많은 어린 처자들이 또다시 낯선 이국땅으로 끌려와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갈 터였다. 그들을 ‘미천하다’고 칭하는 그녀의 음성은 소름 돋도록 잔인했다. 기황후에게 고려는, 단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내 옆에 선 왕기는 마치 돌덩이처럼 미동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고려가 안으로는 외척들로 문제가 많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구 소식이 끊이지 않소. 지금의 어린 왕이 어찌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겠소? 그러니… 폐위할까 하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한 나라의 왕을 폐위한다는 말이, 일개 황후의 입에서 이토록 거침없이 흘러나오다니. 고려의 왕이 이토록 비참하게 내쳐질 수도 있단 말인가. 곁에 선 왕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비참한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듯, 바닥만 응시하던 시선을 더 멀리 허공에 늘어뜨려 놓았다. 축 처진 어깨와 미세하게 흔들리는 몸짓은 그의 위태로운 처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강릉대군, 그대의 기예가 뛰어나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특히 그림 실력이 출중하다지.”

기황후는 나긋한 목소리로 왕기에게 말을 붙였다.


“허나 이제 왕이 될 때도 되지 않았소. 폐하도 당신을 염두에 두고 있소. 원 황실 출신이 아닌 고려인이라는 점 때문에 계속해서 왕위에 밀려났으니… 내가 배필로 그대 옆에 서 있는 부다시리 공주의 언니, 에르덴 공주와 혼인하면 어떨까 해서 불렀소.”

기황후는 마치 왕기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나 그 웃음 속에는 왕위를 앞세워 고려를 약탈하려는 냉혹한 계략이 감춰져 있었다.


“내가 부다시리 공주를 부른 이유는 그대는 고려에 오래 살았지 않소. 그러니 에르덴 공주와 강릉대군의 만남을 잘 도와주구려.”


왕기는 원나라 황실이 시키는 대로, 힘없이 그저 '네, 네' 하며 고개만 끄덕이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나약하기 그지없는 그가 정녕 고려의 왕좌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허망함과 절망감이 뒤섞여 정신이 아득해졌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나는 그저 마른기침으로 애써 삼킬 뿐이었다. 고려의 앞날에 드리워진, 검고 거대한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그와 함께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각자의 별궁으로 향해야 하는 길목에 섰지만, 나는 기어코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시간 되십니까?”

나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나의 부름에 꽤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내 발걸음을 옮겨, 인적 드문 정원 깊숙이 들어섰다. 숨 막힐 듯한 정적만이 감도는 그곳에서, 앞서 걷던 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에게 물었다.


“고려가 미천하다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싸늘한 침묵 속에서 어딘가 날카롭고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 와 있는 고려 사람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짓밟히고 또 짓밟히며 핍박받고 있습니다. 부디 왕이라면, 백성의 아픔을 헤아려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숙여 간절히 부탁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 고려를 헤아리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왕이 아닙니다.”

나직한 그의 음성에는, 깊은 절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이제 왕이 되시지 않습니까?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왕위에 오르라 명하셨고, 저희 언니와 곧 혼인할 것이지 않습니까?”

“원 황실 출신이 아니면 왕이 되지도 못하는 내가, 당신 언니와 결혼한다 한들… 저에게 무슨 힘이 생기겠습니까?”

처절한 자조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는 축 늘어진 어깨를 더욱 깊이 수그렸다.


“그것이 부끄럽습니까? 당신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당신을 아비라 섬기는 백성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으나, 그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와 결연함이 실려 있었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에르덴 언니는 고려를 사랑하는 분이지요. 당신이 고려를 지킬 수 있도록, 언니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연경에서 힘이 되어 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왕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백성을 꼭 지키십시오”


나의 간절하고 절박한 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기력의 그림자는 끝내 거두어지지 않았다. 어찌 하루아침에 달라지겠는가? 허나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아니면 내가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한참을 맴돌다 밤이 깊어가는 시각이 다 되어서야 쓸쓸히 나의 처소로 들어섰다. 눈을 감으면 왕기라는 사내의 힘없이 축 처진 어깨가 아른거렸고, 뒤이어 고려를 '미천한 것'이라 깎아내리던 기황후의 싸늘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모든 잔상이 한데 뒤엉켜, 이 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도사가 내게 건넸던 은병 두 개. 어쩌면 나는 그의 무기력한 모습에 그를 더 다그쳤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그 도사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나 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달빛이 휘영청하게 쏟아지는 밤이었다. 묵직한 숙명의 기운이 이 밤을 뒤흔들어 쉬이 잠들지 못하게 하였다.





카이두 장군과 내가 정식 혼인 상대로 확정되면서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했지만, 더 이상 공주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게 무례한 언행을 일삼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야르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러나 외부의 날 선 시선보다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드는 것은, 중양절 그날 밤 이후 카이두와 나 사이에 드리워진 깊은 침묵이었다. 우리는 그때 벌어진 일에 대해 의식적으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의 간극만을 더욱 넓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 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황궁 내부에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태황태후가 새롭게 들인 환관, 오라버니였다. 처음에는 친 오라버니를 닮은 어딘가 낯익은 뒤통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응시하는 눈빛 속에서, 섬뜩하리만치 익숙한 그 시선 때문에,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태평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그가 태황태후의 환관이 되었단 말인가? 부정하고 싶었다. 허나 그는 태황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빠르게 황궁의 실세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모든 과거를,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머지않아 그 진실의 올가미로 내 목을 잔인하게 조여올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가 홀로 있는 틈을 타, 주저 없이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 주위의 시선을 피해 인적 없는 곳으로 그를 사정없이 이끌었다.


“어떻게 된 거야!”

격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차가운 조롱으로 돌변했다.

“공주라니! 너에게 가당키나 하는 말이더냐!”

그는 픽하고 짧은 비웃음을 흘렸다. 내 심장이 쿵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고려로 돌아가! 내가 가진 모든 금은보화를 다 줄게!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곳은 훨씬 더 위험한 곳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목이 터져라 그를 설득했다.


“동생이 공주인데, 나도 그 덕을 봐야지.”

그가 살아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의 눈에 서려 있는 이 비루한 탐욕에 몸서리가 쳐졌다.

“내 친 오라비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나는 죽은 목숨인 거 몰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알아.”

그는 짧고 냉정하게 답했다. 그 뻔뻔함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어찌 그래!”

나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 가라고? 장난하냐? 내가 거세까지 했는데 이대로 고려로 돌아가라고? 너도 함께 가자.”

“뭐? 내가 이렇게 떠나면 카이두 장군이 위험해진다고!”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네가 감히 공주라니! 그러면 나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역시 이태평 다웠다. 그 말을 저리도 태연히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보다 나를 아래로 두려는 아집이 그토록 탐하던 금은보화마저 마다하게 만든 것이다. 그에게는 내가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 현실이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을 테니까.


“너 혼자 황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동안, 나를 찾으려고 눈곱만치도 노력하지 않았다니! 내가 얼마나 개고생한 줄 알아?”

그는 비열하게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의 뻔뻔한 낯짝 때문에 역겨움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날 산속에서 몽골군에 잡혀갈 때, 날 보고 숨은 사람은 당신이야!”

간신히 참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더 큰 비난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비통해하실까? 딸은 공주라는데! 무려 원나라의 공주라는데! 너는 가족을 챙길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던 거지?”

나는 비틀거렸다. 그의 끝없는 비겁함과 추악함에 치가 떨렸다.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거 몰랐어?”

나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태평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뭐라고?”

“설마 그날, 그대로 혼자 도망친 것이야?”

그의 움찔하는 표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웃기지 마. 불효를 저지른 것은 너야! 나만 못된 사람 만들지 말라고! 너는 항상 이런 식이지. 어차피 넌 죽은 목숨이야. 곧 이 세상에 없어질 사람인데 뭐.”

그는 내가 자신에게 가한 비난을 되돌려 주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죽은 목숨이라니?”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른 채 물었다.

“내가 다 폭로할 거거든”


이태평은 괴상한 웃음을 늘어뜨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카이두에게 당장 알려야 했다. 이태평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태황태후가 이태평을 끌어들이다니.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카이두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결론은 지독히도 무자비했다.

“이태평을 당장 죽여야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네?”

나도 모르게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내가 기대했던 답은 결코 이것이 아니었다.


“그 자가 살아있는 한, 당신과 나는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최종 승인한 폐하까지 엮인다면, 정말이지 되돌릴 수 없는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카이두의 눈빛은 냉철하리만치 차가웠고, 그의 말은 심장을 도려낼 만큼 날카로웠다.


“문제가 생기면 죽여야지 해결되는 것입니까?”

나 역시 이태평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허나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이어 간절히 말했다.


“까막절벽에서 오라버니가 당신을 업고 오지 않았더라면, 저 혼자서는 당신을 살리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비열할지 몰라도 당신을 살린 '은혜'라는 빚을 그에게 반복적으로 말하며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태평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더 큰 문제가 되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카이두는 냉혹하게 상황을 짚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연민도 스며 있지 않았다.


“그러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두를 죽일 참입니까? 저도 당신에게 해가 된다면 그때는 저 또한 죽이겠습니까?”

나의 마지막 말은, 차마 내뱉지 말았어야 했다. 철옹성 같던 그의 얼굴에 금을 내고야 말았다. 단단했던 그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


“우리는 참 다른 사람이오. 나는 당신을… 점점 이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의 말은 나의 영혼마저 시리게 만들었다. 그에게 미처 닿지 못한 나의 감정들이 공중에 떠 다녔다. 이번에도 우리 사이의 간극은 끝내 좁혀지지 못했다. 그는 매정하게 돌아섰고, 한동안 나를 찾지 않았다. 그의 온기는 더 이상 내게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저 곧 있을 ‘천추대연’ 준비로 바쁘리라 생각했다.


아마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이태평을 죽여야 마땅했다고, 그것이 옳았다고 뒤늦게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이태평을 살려둔 대가로 내가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오라버니가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그를 해칠 수 없다. 나 살자고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내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카이두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아니 되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그를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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