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했던 여름바람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계절은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햇살 가득한 낮에는 하늘이 한없이 청아했지만, 밤이 되면 귀뚜라미 소리가 을씨년스레 울려 퍼졌다. 귀뚜라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어느 밤부터, 황궁에는 이상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나는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나의 이불을 잡아당기는 서늘한 감촉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숨소리마저 삼킨 채 잔뜩 긴장하던 그때였다. 역한 술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네가... 네가 감히 여기에 있을 리가 없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는 엘 테구스였다. 광기에 휩싸인 듯한 그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밤에도 짐승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거친 핏자국이 희미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입술은 거무스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악몽 속에서 뛰쳐나온 망령 같았다.
"내가 그녀를... 죽였어. 내 손으로... 무참히... 너도... 너도 곧..."
그는 세차게 고개를 휘저으며 횡설수설했다. 목소리는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고, 말끝은 자꾸 흐트러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들이 뒤섞여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치 수많은 유령들이 그의 몸에들러 붙기라도 한 듯, 더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헤매다가 이내 나의 얼굴에 꽂혔다. 마치 죽은 이의 손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으로 내 뺨을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 갑자기엘 테구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탁자 위의 도자기들을 내동댕이 치기 시작했다.
쨍그랑! 콰당탕!
황태자 엘 테구스의 난동은 나의 시종들 조차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벌벌 떨며 문밖에서 작은 비명만 질러댈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황태자에게 감히 이 난동을 멈출 것을 명할 수 없을 것이다. 태황태후 마마의 유일한 혈육에게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역으로 화를 입을 테니까.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숨죽이던 그때, 깨진 도자기 파편이 나의 볼에 튀더니 생채기를 냈다. 볼에서 미지근한 피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나의 피를 본 순간, 엘 테구스의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부다시리는 분명 내가 강에서 죽였는데, 어째서 네가 살아있냐 말이다!!”
그는 나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나는 엘 테구스의 영혼이 부다시리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한숨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의 숨소리는 몹시도 거칠었다.
“미안하다 하지 않았느냐. 내 장난이었다 하지 않았느냐. 허나 너도 내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
그가 갑자기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더니, 그의 목에 난 깊고 오래된 상처를 보여주었다. 광기 어린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어 말했다.
“다시 기회를 주러 왔느냐? 내게 남긴 상처를 너에게 되갚아줄 기회를 말이다. 으하하하하하”
그는 울다가 웃다가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광기 서린 미소가 입술 가득 불길하게 퍼지더니 앉았던 자리에서 갑자기 격렬하게 솟아올랐다.
“내가 네 년의 목을 다시 벨 수 있도록 살아 돌아왔느냐???”
그의 손에 든 검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칼을 무지막지하게 허공에 가르며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목덜미를 겨누는 칼끝 앞에서 나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해지는 가운데, 칼날의 서늘한 기운이 밀려들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 찰나, 문이 산산조각나며 벌컥 열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카이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카이두의 눈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기가 깃든 그의 시선은 이내 엘 테구스에게 향하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자루로 그의 목덜미를 정확히 강타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엘 테구스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기절한 것인지, 신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제야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낼 수 있었다. 카이두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몸을 마비시키던 공포가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그가 생채기가 난 나의 볼에 약을 발라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찌 그리 무모하게, 그 자리에 어떤 방어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습니까? 제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는 평소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질책했다.
“하늘이 도왔나 봅니다. 정말이지 딱 맞춰 저를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나는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지금 이 상황에 농이 나오십니까?”
카이두의 찌푸려진 미간은 풀릴 줄 몰랐다.
“그 자가 하는 마지막 말을 끝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부다시리 공주는 실종이 아니라 살인을 당한 것 같습니다. 헌데 아직 사건의 내막을 다 듣지도 못했는데 장군님이 나타나서 그 자를 기절시키고 말았습니다.”
내 말에 카이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저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옵고, 그저 그 자의 소행을 밝히고 싶다는 욕심이 과했습니다.”
카이두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의 목숨은 두 개입니까? 어찌 그렇게 초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하루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수없이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인지 죽음이 익숙한가 봅니다.”
나 역시 두려웠다. 엘 테구스가 나의 목을 베는 줄 알았다. 허나 숨통이 조여 오는 공포 속에서도,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내가 대신 살아갈 부다시리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진실을 파고들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어찌 여기에 있습니까?”
“오늘 밤 대도에 도착했습니다. 밤이 깊어 내일 아침 일찍 입궐할 참이었는데… 아버지께 말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리로 당장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혼인 말입니다. 에르덴 공주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헤매다 이내 내게로 향했다. 그는 주저하는 듯 보였다.
“저와의 혼인 괜찮습니까? 원치 않으시면…”
“좋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답했다. 그는 이미 내게 너무도 큰 존재가 되어 있었다. 방금 전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그가 내게 내민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카이두는 내게 이 황실에서 살아갈 이유이자, 방패였다. 그가 원치 않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뒤섞여 나도 모르게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 있었다.
“제가 장군님과의 혼인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혹여 장군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좋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나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 보였다.
“죽이는 자와 살리는 자의 만남이란, 참 재밌구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리더니, 이내 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 들었다. 차갑고 단단했던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거친 손 위에 가냘픈 비비추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여전히 영롱한 연보랏빛을 머금은 채였다. 전장을 누비던 장군이 이 작은 생명을 꺾이지 않게 품어온 것이다. 이 투박한 다정함이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참아왔던 그리움이 터져 나와, 나도 모르게 그를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그가 나의 등을 살포시 도닥여 주었다.“당신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저도 당신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당신이 잠들어 있을 줄 알면서도, 당신의 온기가 배어든 이곳에서, 잠시라도 머물다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니 이렇게 달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삶은, 내 안의 모든 연민을 마비시켜야 가능했다. 어린 나이에 장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백전백승, 그것은 나의 숙명이자,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숨 쉬는 모든 순간, 나는 끝없이 죽여야만 했다. 다른 이의 고통에, 심지어 나의 고통마저 무뎌져 갔다. 허나 그녀와 함께일 때면,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잠시 평온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애써 외면했던,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해 주었다. 내게 다시없을,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그녀의 교육을 맡으라는 것은 황명이었다. 그러나 내 평생 이토록 간절한 황명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황량한 사막 같은 나의 삶에, 그녀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이번 원정은, 다른 어떤 때와도 달랐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이토록 간절히 바랐던 적이 내 평생 있었던가. 피로 점철된 나의 육신과 영혼을 어서 그녀에게서 치유받고 싶었다. 고려에서 수많은 밤을 지내면서, 오직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얼마나 바랐던가. 허나 궁에 도착하여 엘 테구스를 보는 순간, 나는 이성을 잃을 뻔했다. 내 손에 쥐고 있던 검이 기어이 그 자의 목을 베었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슬아슬하게 칼자루로 그를 내리칠 수 있었다.
엘 테구스는 숙영지 게르에서도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었었다. 오늘로써 두 번째 칼을 겨누게 된 것이다. 이곳에 그녀를 데리고 오기로 마음먹은 순간, 어느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다시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다니. 내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엘 테구스, 저 자를 황태자에서 반드시 폐위시킬 것이다. 오늘 그를 살려둔 자비까지 포함해서 제대로 갚아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