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에르덴의 제안, 운명의 갈림길

by 밤톨맘

황궁의 가장 높은 망루에 올라섰다. 성벽을 감싼 희뿌연 새벽안개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그 선두에는 익숙한 등 하나가 굳건히 나아가고 있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희미해지는 순간, 그와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을 바랐다. 그는 이 외로운 황궁에서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희망이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그 행렬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의 기세로 가득했던 황궁은 이내 아득한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새벽부터 활기 넘치던 훈련장은, 그의 부재만큼이나 텅 빈 듯 쓸쓸했다. 며칠간은 그의 빈자리가 아쉬웠지만, 곧 밀려드는 황궁의 일상 속에 나 역시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생각보다 나는 잘 헤쳐 나갔다. 황실 여인들은 외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단연코 그들의 시선은 나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얼굴에 무엇을 바르고 어떻게 관리하는지 먼저 와 집요하게 캐물었다. 어머니에게 배웠던 ‘흔한’ 미용 지식을 비법처럼 전수해 주니, 친구 사귀는 것이 아주 쉬웠다. 별다른 수고가 들지 않았다. 물론 나의 정체가 탄로 나서는 안되기에, 어머니만 독특하게 사용했던 인삼 면약만큼은 아껴두었다. 허나 햇살 아래에서도 고운 광택이 난다며 칭찬이 쏟아질 때면, 인삼 면약을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혼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가 빠르게 적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에르덴 언니. 그녀는 공주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임인, ‘다회’에 꼭 나를 챙겨 넣었다. 바야르는 나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날 선 질문들을 퍼부었지만 애초에 에르덴 언니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아버지가 나를 본 뒤 잃었던 기색을 되찾았다는 이유 하나로, 언니는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오월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계절이었다.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별무원은 울창한 수목과 그 사이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국의 꽃들로 오색찬란한 자태를 뽐냈다.


가장 아늑한 누각 아래, 고운 비단 방석들이 깔리고, 그 위로 섬세하게 조각된 탁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다. 은으로 만든 차 도구들이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고, 그 옆으로는 아기자기한 다과들이 정갈하게 놓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나른한 악기 소리는 마치 별무원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그림처럼 느껴지게 했다.


공주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고 모여들었다. 오전에 이어지는 지루한 예법 수업이나 정치학 강론에서 벗어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곱게 단장한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웃음소리가 마치 숲 속의 맑은 새소리처럼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잔잔한 웃음꽃이 피어나고, 나긋나긋한 대화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차향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새하얀 찻잔 위로 고운 손가락들이 오고갔다. 누구는 며칠 전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머리 장식을 선보였고, 또 누구는 멀리 북쪽 지방에서 들여온 비단 옷감의 광택을 뽐냈다. 누구도 차갑게 얼어붙은 황궁의 규칙이나 숨 막히는 권력 다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향기로운 차와 달콤한 다과처럼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나 역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에르덴 언니 곁에 앉아 별무원이 선사하는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그리고 차 향을 깊게 들이켰다. 한 모금에도 온몸으로 퍼지는 자스민 향. 까막절벽 아래에서 그에게서 맡았던 향. 그 관능적인 향을 잊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자스민은 그와 함께 한 날들로 나를 한껏 데리고 갔다. 지금쯤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가 비비추 꽃을 잊지는 않았을까? 하찮은 나의 청이었으니 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기도 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를 무사히 볼 날만을 머릿속에 그리며 혼자 미소 짓고 있는 그때였다.


“드디어 카이두 장군님이 부다시리 공주 곁을 떠났습니다.”

에르덴 언니가 여러 차례 눈짓을 주며 주의를 주었음에도, 비수 같은 말들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황실이 뭐가 그리 위험하다고 하루 종일 붙어 있는지요. 그리 붙어 있으면 없던 정분도 나겠습니다.”

“호호호, 에구머니나 망신스러워라”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입을 가렸지만 통쾌하다는 듯 신랄하게 웃어 젖혔다.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안달 난 얼굴들이었다. 에르덴 언니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던 그때였다. 나는 언니의 팔을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언니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황실 밖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린다면 이 정도 수모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저를 향한 무례한 언행은 참겠으나, 제 언니까지 모욕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각 주변을 울리던 가벼운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바야르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공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가운데 앉아 있던 에르덴 언니가 나와 바야르 팔을 동시에 잡았다.

“둘 다 그만해. 그리고 부다시리는 다회가 끝나고 내 방으로 가자꾸나”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언니들의 집. 아니, 이제 나의 집이기도 했다. 에르덴 언니 때문이었을까? 이곳은 차가운 황궁의 위압이 아니라, 익숙한 풀꽃 향이 배어든 포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언니의 방은 화려한 궁궐과 다르게 참 아늑한 공간이었다. 잘 정돈된 침상과 수수한 문갑. 그리고 한쪽 벽에 놓인 책상 위에는 여러 빛깔의 비단 천과 작은 바늘집, 그리고 손바닥만 한 나무 수틀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초록빛으로 짙게 물들인 작은 정원이 보였다. 방 중앙에 놓인 작은 다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언니는 한참을 고민하던 얼굴을 하더니 이내 고요하게 물었다.

“카이두 장군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나는 당황스러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었다. 언니의 깊은 눈빛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좋아하느냐?”

두 번째 질문은 더 직설적이었다. 에르덴 언니는 내가 이곳에 정을 붙일 수 있게 해 주었고, 가족이라고 처음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의 약혼자를 좋아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숨이 막혀오는 이곳에서, 카이두 장군은 내가 ‘이로운’으로 돌아가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낯선 이곳에서, 그저 처음으로 의지하게 된 사람입니다.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허나, 거짓을 내뱉은 것마냥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언니의 말간 눈동자 앞에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염치 없는 나의 마음이 수면 위로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에르덴 언니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작은 다탁 위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네가 카이두 장군님과 혼인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심코 내지른 목소리가 방안 가득 크게 울려 퍼졌다.


“장군님과 나는 그저 두 가문을 엮는 견고한 매듭에 불과하지. 그러니 서로에게 각별한 애정은 없지 않겠느냐? 그저 가문이 정한 길을 따를 뿐이었다.”

언니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아련하면서도 단호했다.

"허나 너는 다르더구나. 장군님이 너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러니 내가 아니라, 네가 카이두 장군님과 혼인하는 건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다. 너만 좋다 하면, 내 당장 아버지께 말씀드릴 것이다.”


에르덴 언니의 눈동자에서 굳은 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자, 언니는 나의 손을 잡아 당겼다.

“이 황궁에서 너를 지켜줄 사람은 카이두 장군님 뿐이니, 너를 도울 수 있게 해다오. 장군님은 너에게 견고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야.”

“언니….”

내 숨이 턱 막혔다.


“고려에 새로운 왕을 세운다고 하는구나. 폐하 곁에서 케식으로 머물던 고려의 ‘왕기’라는 사람인데, 우리 세 자매 중 한 사람이 그와 혼인으로 맺어질 모양이더구나. 멀고도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너를, 아버지가 어찌 다시 이국 땅, 고려로 보낼 수 있겠느냐. 이제 겨우 돌아온 너를 또 내보내면, 아버지는 다시 무너질 것이야. 바야르는 아마,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을 테니…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언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다짐과 함께 미묘한 설렘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네가 들려주던 고려 이야기가 좋더구나. 듣고 있으면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마치 내가 그 땅으로 시집갈 운명이었던 거야. 내가 고려 왕후가 되면, 꼭 나의 가장 든든한 벗이 되어주어야 한다. 네가 고려에 오래 살았으니, 이모저모 그 땅의 모든 것을 알려주렴.”


그녀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그때였다.

“콰아앙!”

문짝이 박살 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바야르가 안으로 뛰어들어 괴성을 질렀다. 그녀의 눈은 핏발이 서고 흰자위가 번들거렸다.


“다 네가 돌아와서 이렇게 된 거야! 너만 아니었으면 에르덴 언니는 분명 카이두 장군을 내게 양보했을 것이다! 네가 다 망쳐 놓았어! 네가!! 내가 너를 기필코 없애고 말 테다.”

내가 채 반응할 틈도 없이, 에르덴 언니가 재빠르게 몸을 던져 바야르를 붙잡았다.


“바야르, 정신 차려! 정말 요즘 왜 이러는 것이냐! 부다시리, 다치기 전에 얼른 궁으로 돌아가거라!”

내게 달려들려는 바야르를 붙잡으며 에르덴 언니는 나를 문밖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나는 방금 일어난 일들 때문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내가 카이두 장군과 결혼이라니. 거기에다가 에르덴 언니는 고려 왕후가 된다니. 순간적으로 오래전 나를 찾아와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던 도사가 떠올랐다. 내 손에 쥐어준 은병 두 개.


‘고려의 백성을 부탁하네. 부디 아가씨의 이름처럼 그들을 이롭게 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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