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황실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부다시리

2부: 연경에서

by 밤톨맘

차가운 설원 위를 달리던 가마는 긴 진동과 함께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 대신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가마 밖에서 들려왔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문이 열리자, 눈앞을 가득 메운 눈부신 햇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낯선 공기와 낯선 소리, 차가운 겨울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와 나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판을 밟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숨을 들이켜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끝없이 펼쳐진 도시. 거대한 성벽이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있었다. 겹겹이 이어진 궁궐 지붕은 용의 비늘처럼 반짝였고, 처마 끝마다 늘어진 화려한 장식들이 햇빛을 받아 광채를 뿜어냈다.


“공주님, 이쪽입니다.”

카이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목소리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듯 아득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마치 꿈을 꾸는 듯 낯선 공간을 걸어갔다. 내가 멈춰 선 곳은 화려하게 조각된 대리석 광장이었다. 황실의 사람들은 한눈에 보아도 기개가 달랐다.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 입은 사내들과 여인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늘어서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 내렸다. 못마땅하다는 듯한 가소로운 시선들.


나이 지긋한 사내가 무리 중앙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 기세에 압도되어 주변의 모든 웅성거림을 잠재웠다. 서서히 다가서는 걸음마다, 그의 허리에 단단히 둘러진 가죽 혁대에 박힌 거대한 은 장식이 위세를 떨치듯 햇빛 아래 차갑게 빛났다.


위왕 베이르테무르.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나를 향했다. 오랜 고통으로 메마른 눈동자. 그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사라진 나를 그리워할 의주의 아버지가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서였을까, 그에게서 풍기는 아련한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아버지’라는 단어를 감히 입 밖으로 내야 했다. 지금부터 나는 그의 딸, 부다시리였다.


내 위로는 오라버니 하나, 언니 둘. 오라버니는 카이두와 막역한 벗이었으나 함께 떠난 전장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오라버니까지 잃게 되자 마음의 병을 얻어 두 해 전, 이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막내딸만큼은 기필코 찾아야 했다고. 그토록 애타게 찾던 막내딸이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아버지 양 옆으로는 카이두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첫째 언니 에르덴과 둘째 언니 바야르가 나란히 서서 그를 부축했다.


베이르테무르는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내가 정말 그의 막내딸로 비치는 걸까. 그 순간이었다. 그의 눈가에서 커다란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굳은 얼굴 위를 타고 내려와 턱 끝에서 뚝 떨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나의 뺨을 감쌌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나의 부다시리…”

나지막이 뱉어진 그 한마디에, 나는 그대로 숨이 멎는 듯했다. 처절한 그리움이 실린 목소리가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 지독한 슬픔이 나에게 전이되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휘감았다.

이후의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황제의 명으로 나는 별궁으로 이송되었다. 반짝이는 보석과 풍성한 비단 치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곱게 땋은 내 머리칼 위로 차가운 비녀와 무거운 비단옷이 나의 목과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낯선 내 모습을 마주했다. 눈가의 상처 위로 옅은 분을 두드렸지만, 나의 불안한 눈동자처럼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감춰지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끝없이 나를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이제 연회가 시작됩니다, 공주마마.”

내 앞에 펼쳐진 황금빛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쏟아지는 불빛과 비단의 물결, 화려한 향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수십 개의 촛대가 휘황찬란하게 홀을 태우듯 밝혔다. 천장에는 거대한 별자리 문양이 금실로 장엄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바닥에는 은실로 용맹한 몽골 전사들의 모습이 새겨진 거대한 비단 카펫이 깔려 있었다. 기둥마다 박혀 있는 황금빛 보석들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악공들이 일제히 연주를 시작하자, 몽골 전통 복장을 한 무희들이 사나운 말처럼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생동하는 몽골의 기운이 느껴졌다.


테곤 테무르 황제가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몽골의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오는 제1황후, 바얀 후투그와 고려인의 제2황후, 기황후, 울제이 쿠툭이 나란히 앉았고, 다른 한쪽에는 태황태후가 앉았다.


황궁의 사람들은 호화로운 연회복을 입고 잔을 든 채, 서로에게 웃음을 던졌다. 그들은 나를 이리저리 훑고 속닥였다. '돌아온 공주'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발을 디딘 순간, 그들의 장난감으로 내던져질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카이두는 나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지만 그는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카이두는 나의 손을 이끌고 상석으로 향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이 나의 모든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허나 나는 어깨에 힘을 주어 걸어갔다. 숙영지에서 두려움에 치를 떨던 내게 한 발만 떼라던, 그의 강인한 음성이 내 뼛속까지 깊이 새겨진 뒤였으니까.


내가 앉게 될 자리는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가장 잘 닿는, 하지만 동시에 모두의 견제와 시샘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황제의 앞자리였다. 황제의 시선이 나와 카이두에게 닿았다. 그 눈길 아래에서, 카이두는 마침내 나를 자리에 앉혔다.


"부다시리,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그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나는 그를 따라 잔을 들어 축배를 마셨다.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공주, 집으로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태황태후의 시선은 줄곧 나를 향해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우아하고 고고한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가는 눈매가 나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아들이 장난이 심했다지요. 어미가 이리 용서를 구하니 노여운 마음은 푸세요. 황태자가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면 정식으로 공주께 사과드리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주억거렸다.


“헌데, 그대의 얼굴은 몽골 여인과 같은 눈매가 아닙니다? 어찌 기황후와 닮을 수 있습니까?”

순간 황실 내는 정적이 휩싸였다. 모든 시선은 또다시 나에게 집중되었다. 아마 나는 이곳에서 정통성을 끊임없이 의심받을 것이다.

“고려는 쌍꺼풀 눈이 유행이지요. 눈매를 살짝 들어 올려 꿰매는 성형술이 흔하답니다.”

“그렇습니까? 꽤나 해괴망측합니다.”

태황태후는 나의 예상치 못한 답에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그때 위왕 베이르테무르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황태후 마마, 공주의 신원을 이미 명명백백히 밝혔사옵니다. 그러니 의심은 거두어 두세요”

베이르테무르는 그녀를 견제하듯 말을 이었다.

“이제 내 딸은 내 저택으로 돌아가 쉬어야겠습니다. 그간의 고통이 너무 컸으니, 편안한 곳에서 쉬게 해 주시지요.”

점점 지쳐가는 나의 표정 때문인지 그는 나의 손을 잡으며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강직한 목소리 위로,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태황태후의 음성이 포개어졌다.


“오랜 고초 끝에 돌아온 공주를 위왕께서만 품에 안으실 작정이십니까? 이제 황실의 일원이 되었으니 황실의 예절을 먼저 익히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베이르테무르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의 손은 부들거리는 것을 감추려는 듯, 허리춤의 가죽 혁대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태황태후의 말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황실의 예'라는 명분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명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테곤 테무르 황제가 나섰다.


“태황태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위왕의 심정 또한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나, 공주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예법을 익히고 황실의 품격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그의 눈빛은 꼿꼿하게 태황태후와, 베이르테무르를 차례로 훑었다.


“하여, 그 임무를 누구보다 성실히 보필할 자를 붙일 생각입니다.”

그의 시선이 카이두에게 향했다.

“카이두 장군은 공주를 직접 찾아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그간 내 곁에서 수많은 일을 해결해 왔네. 그의 노련함이라면 공주를 황실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시키고, 예법을 익히는 데도 무리가 없을 터.”

테곤 테무르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카이두 장군에게 부다시리 공주의 호위를 명한다. 공주가 완전히 회복되고 황실에 적응할 때까지, 장군이 직접 곁에서 보필하도록 하라.”

카이두는 망설임 없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어 보였다.

“폐하의 명, 받들겠습니다.”


베이르테무르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자신의 막내딸이 권력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현실이 그를 흔들었다. 태황태후가 나를 향해 어떤 계략을 꾸밀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리라. 허나 황실의 '예'라는 명분과 황제의 직접적으로 내린 명령 앞에서 더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태황태후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황제는 태황태후가 ‘예’라는 명분으로 장악하려는 판 한가운데에, 카이두라는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전 07화7화, 다시 쓰는 운명, 공녀에서 공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