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다시 쓰는 운명, 공녀에서 공주로

by 밤톨맘

그녀가 의식을 잃은 지 며칠 째인지 이제 세는 것조차 포기했다. 그녀의 온몸은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고,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는 손목 아래로는 시퍼런 멍이 선명했고, 무릎에는 쓸린 상처 위로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옷자락을 걷어 올리자 허벅지 안쪽에는 끔찍한 검붉은 자국이 띠처럼 둘러져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다문 채 생기 없이 희끄무레했다. 희미하게 미소 짓던 2년 전의 그 얼굴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2년 전,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일들이 마치 전생에서 겪었던 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몽골 여인처럼 매서운 강인함은 없지만 이로운은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토록 맑고도 맑던 고귀한 여인이 처참히 짓밟힌 몸으로 내 침상에 누워 있다. 나와 관계된 여인들 중에 이토록 무력하게 짓밟힌 여인이 있던가. 살벌하다는 황실 내 여인들의 기싸움도 이 잔혹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포로로 잡힌 고려인 중에 의원을 찾아 그녀의 치료를 돕도록 했다. 혹독한 추위와 영양실조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쉬이 일어서지 못했다.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던 그녀의 집은 누추한 곳이었다. 애진작 반지를 팔아 사용하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했다. 값을 상당히 치러주었을 것인데. 여전히 이 반지를 가지고 있다니. 이 반지를 품으며 나를 기다렸을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녀를 비롯한 그 집안에게 빚을 갚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다. 그녀를 부다시리로 만들어 어느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 제발 일어나기만 해라. 지금과 완벽히 다른 삶을 살게 해 주리라.


또 며칠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불안한 마음에 물에 적신 헝겊으로 그녀의 손을 닦고 또 닦아냈다. 2년 전 그녀에게서 받은 비비추 주머니를 그녀 머리맡에 두었다. 이미 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녀가 좋아하던 것이니까. 혹시라도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시라며 쥐어 준 꽃잎은 2년 전 그대로였다. 나 또한 간직하고 싶은 물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죽기라도 마음먹은 사람처럼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작정이라면 제발 그 마음을 고쳐 달라고. 은혜를 갚을 기회를 내게 달라고 속에서 아우성쳤다. 순간 내게 응답이라도 한 듯 맞잡은 손에서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툭툭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응시했다. 그제야 억눌렸던 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이었다. 이 전장 한복판에서, 참혹한 현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짓밟았으나, 눈빛만은 고고하게 빛나는 별처럼 남아 있었다.


“정신이 좀 드시오?”

그녀는 의식을 잃기 전의 모든 일들을 곱씹어 보는 듯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게르 안이오. 이곳에서는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편히 계시오.”


“이제 어쩌면 좋소? 이 일을 어찌해야 하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내게 맡기시오. 내가 해결할 테니 그저 회복에만 신경 쓰시오.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아시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제야 자신의 상처투성이인 몸에서 감각이 돌아오는지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앉으려는 그녀를 다시 눕히며 부탁했다.


“당분간은, 제발 당분간만이라도 회복에만 전념해 주시길 바라오.”

나는 고려인 의원을 불러 그녀를 다시 살피도록 했다.




온몸에 남아있는 상흔이 지난날의 끔찍한 기억을 선명히 되살렸다. 황태자의 날카로운 칼날에 목이 베인 상처를 어루만졌다. 반지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카이두가 그 자리에 없었으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공녀에서 공주라니. 나의 상황은 180도로 달라졌다. 이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었다.


오라버니가 등을 돌렸던 그 마지막 순간들이 악몽으로 찾아왔으나 눈을 뜨면 따뜻한 침상 위였다. 의원은 수시로 들락거리며 나의 몸을 살폈고, 이 난리통에서도 약재는 어떻게 구해오는지 녹진한 약을 매일같이 달여다 주었다. 뽀얗게 끓인 닭죽이 매 끼니 제공되었고, 말 우유에 소금을 타서 만든 따뜻한 수테차를 수시로 먹였다. 아리지 않은 부분이 없었지만 몸은 곧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밀려오는 안도감 위로 싸늘한 죄책감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살기를 원했던 나였다. 죽기 전에 아버지를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모진 학대도 견뎌온 나였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기만을 그토록 바라왔건만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버거웠다. 저 밖의 고려 여인은 여전히 핍박받고 있다. 그 원인이 이 원나라 때문이다. 나는 나를 구해준 이 원나라 장군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인가. 분노를 해야 하는 것인가. 경첩에서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카이두가 고개를 숙여 들어서는 순간, 차가운 밤공기와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몸은 어떻소? 안색이 제법 좋아졌소.”

나는 그에게 어떤 답을 돌려주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이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살려주었던 때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그래서 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연고도 없는 나를 살리려 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는 침잠하는 나를 건져 올리기 위해 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신 또한 어느 누구의 아들일 테며, 돌아가야 할 가족이 있을 테니까요.”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나는 전장에서 사람을 베어 쓰러뜨릴 때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이 되지요. 허나 당신은 환자를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는구려.”

나는 웃으며 가볍게 던지는 이런 일상적인 담소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고려인은 여전히 핍박받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감사해야 하나요? 아니면 원망해야 하나요?”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분노와 슬픔, 혼란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이 모든 상황이 개탄스럽습니까? 허나 바뀌는 것은 없소이다. 당신은 이제 원나라의 부다시리 공주입니다. 곧 대도로 갈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가족들에게 당신을 소개해야지요.”

그 말에 내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떤 운명의 굴레가 나의 어깨를 거세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저는 그 누구도 속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잘할 자신도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정말이지 두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고려인을 구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부다시리 공주가 되십시오. 그리고 최고의 자리로 올라가십시오.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가지란 말입니다. 그것이 방법입니다. 이 좁디좁은 게르 안에서 개탄해 봤자 무엇이 바뀌겠소? 고려는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일 뿐입니다. 그러니 핍박받는 고려인은 앞으로 더 늘어날 뿐이겠지요. 그들을 구하고 싶다면 높이 올라가십시오. 그들을 구할 방법은 오직 이뿐입니다.”


카이두는 나의 회복을 확인한 뒤부터, 낮에는 틈틈이 게르 밖으로 나가 돌아가는 상황을 긴밀하게 파악하려는 듯했다. 이따금씩 고위 장군의 복장을 한 사내들이 조용히 그를 찾아와 밤이 깊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눈빛은 전장에 가득한 살의와 달랐다. 다른, 어떤 야망과 계산이 서린 얼굴이었다. 그들이 나누는 은밀한 대화의 파편들, 지시를 내리는 장군들과 지시를 받드는 병사들. 나는 퍼즐 조각을 맞추듯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특히 엘 테구스 황태자와 카이두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류는 숨 막히게 했다. 카이두는 엘 테구스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복종만을 담지 않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대화 속에서 ‘태황태후’, ‘황제’, ‘황후’, 같은 단어들이 섞여 나왔다. 그들이 원나라 황실의 최고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나는 원나라 황실의 권력관계에 얽힌 존재가 되었음을 마주해야 했다.


밖에서는 흰 눈이 쉼 없이 내렸다.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게르 밖은 병사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카이두가 건넨 델을 입고 나와 조금씩 해체되어 가는 게르를 훑어보았다.


“당신의 집과 가족이 있는 ‘대도’로 곧 떠날 것입니다. 당신의 아버지 위왕께서 그대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리고 밖은 무척 춥습니다. 옷을 단단히 여미세요.”

카이두는 담담하게 말하며 나의 옷을 여며 주었다.


“솜을 덧댄 델이라 아주 따뜻할 것입니다. 제법 원나라 사람 같습니다.”

황실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결국 나를 밀어 넣어야 하는 것인가. 나의 운명은 어디로 흐르는 것인가.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나를 흔들어 놓았다. 게르 문턱 앞에서 발이 얼어붙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침상에서 나를 일으킨 후, 단 한 번도 이 좁은 문 밖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마치 뿌리라도 박힌 듯 단단히 박혀 섰다.


“왜 나가지 않습니까? 무엇이 그대를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겁니까?”

“저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두렵습니다. 고려 계집이 하루아침에 원나라 공주라니요.”

“공주님 뒤에는 제가 항상 서 있을 것입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제가 살아있는 한, 그 누구도 당신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작은 세상에서 한 발만 떼십시오. 그다음 모든 일은 제가 할 것이니 어떤 두려움도 품지 마십시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게르 밖으로 나아갔다.




테곤 테무르의 명은 단 하나였다. 이 원정에 내가 합류한 이유는 황태자 엘 테구스의 동태를 살피는 것. 대도 내 황실 권력의 판도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테곤 테무르가 엘 테구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무조건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그는 황제의 입지를 견고히 해줄 뿐만 아니라 황태자를 테곤 테무르의 아들, ‘아유시리다르’로 세울 수 있을 터였다. 허나 베이르테무르 어르신은 여전히 중립적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막내딸 부다시리를 찾아 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엘 테구스가 자신의 딸 ‘부다시리’를 그토록 처참히 짓밟았다는 사실이다. 베이르테무르는 더이상 중립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베이르테무르는 내게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로운을 무사히 대도에 데려가야 한다. 이 가냘픈 고려 여인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인한 몽골 여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원정에서 맡은 마지막 임무는 바로 이것이다.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설원이 펼쳐졌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는 눈꽃이 피어 있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정지되어 보였다. 병사들의 긴 행렬 중간에서 가마 한대가 나아갔다. 바퀴는 눈과 마찰되어 ‘삐빅삐빅’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차갑게 울었다. 마치 그 안에 이로운처럼 말이다. 이로운은 다가올 미지의 공포 때문인지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면 멀어져 가는 고려 때문에 심란한 것인가. 그럼에도 그녀는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아니 된다.


지금쯤 엘 테구스의 친어머니이자, 테곤 테무르의 양어머니인 태황태후는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어떤 잔혹한 수를 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허나 중립을 유지하던 베이르테무르가 움직일 터였다.


이로운은 이제 내가 보아온 황실의 여인들처럼 독기를 가득 품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곳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니까. 허나 그녀의 그 맑은 눈빛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문득 두터운 델 속에서도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떠올랐다. 나는 이 지옥으로부터 그녀를 구했는가 아니면 또 다른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는가. 허나 답은 한 가지일 뿐이다. 높이 올라서야만 살 수 있다.


나는 속도를 늦춰 그녀의 가마와 나란히 걸었다. 곧 창문이 열렸다.

“가마 안이 갑갑한 모양인데 저와 함께 말을 타 보시겠습니까? 오늘은 겨울 답지 않게 날씨가 푹합니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발을 등자에 올려 준 뒤 말잔등에 태웠다. 말을 처음 타본 사람들은 말의 높이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녀 또한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하고 내리겠다고 손짓했다. 허나 이대로 내려오게 할 수 없다. 이제는 말과 익숙해져야 한다. 몽골인에게 말이란 다리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 뒤에 올라탔다.


“이제 말과 친숙해져야 합니다.”

나의 가슴과 그녀의 등이 꽤나 밀착되어서인지 그녀는 긴장한 듯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뻣뻣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돌처럼 딱딱하게 타면 오늘 밤, 엉덩이에 불이 나듯 아플 것입니다. 따그닥, 따그닥, 제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세요”

“이렇게 바짝 붙어 있으니 당혹스럽습니다.”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홍조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나의 감각들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야릇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이 모든 감각들을 떨치기 위해 애써 고삐를 바투 잡아 속도를 냈다.


“당신이 살아갈 곳이 어떤 곳인지, 가족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를 경계해야 하는지 알려드릴 것입니다.”

말은 부드럽게 설원 위를 달렸다. 그녀는 내 앞에서 여전히 뻣뻣하게 앉아 있었지만, 아까의 수줍은 얼굴은 아니었다. 오직 정면만을 곧게 바라볼 뿐이었다.


"황궁은 숙영지의 게르보다 더 살벌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녀에게 황궁의 어두운 그림자를 똑똑히 보게 해야 했다. 피하지 않고 직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당신은 앞으로 위왕의 딸로 '왕족'이 됩니다. 허나 그 왕족의 피는 당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입니다. 황실 내에서는 오직 '권력'만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앞으로 당신은 매일 아침 황실의 최고 어른이신 태황태후마마께 문후를 여쭙게 될 것입니다. 태황태후마마는 엘 테구스 황태자의 친 어머니입니다. 테곤 테무르 황제와 엘 테구스 황태자는 이복형제 관계가 됩니다.”

엘 테구스에 당한 그날의 치욕 때문인지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 당연한 반응이었다.


"태황태후마마께서 당신에게 사람을 붙일지도 모릅니다. 황실은 듣는 귀가 많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황실 여인들의 기싸움이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궁궐은 사건과 음모가 끊이지 않으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제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면 어찌 됩니까?”

나는 말을 잠시 멈췄다. 그녀는 내 옷자락을 놓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마른 얼굴 위로 차가운 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밝혀지는 일 따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헛된 걱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마세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은 듯 보였지만 그녀는 절망 속에도 잠식되지 않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굳게 닫혔던 입술을 어렵사리 떼고 있었다.


“이 연극을 제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당신이 위험해지십니까?”

“예, 제 목숨은 이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이 보다 더 나은 답변을 찾을 수 없었다. 미안하게도 그녀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타인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문득 2년 전,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피 묻은 손으로 헝겊을 부여잡고 고군분투하던 그녀의 처절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내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누구를 따르고, 누구를 경계해야 합니까?”

그녀의 결연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이렇게 기쁠 일인가. 나는 입가에 번지려는 미소를 애써 참으며 말했다.


“저는 테곤 테무르 황제 밑에서 그의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테곤 테무르는 황실 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고려 대청도로 유배를 갔었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는 그를 보필하며 밤마다 책을 읽히며 그를 가르치셨습니다. 이후 저희 가문은 지금의 황제를 옹립하게 되었지요. 제가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황제에게 두 명의 황후가 있습니다. 그중 제2의 황후, 울제이 쿠툭. 기황후는 고려에서 공녀로 왔던 여인이었습니다. 고려인이었지만 이제는 몽골인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지요. 아마 고려라는 공통점으로 그녀가 당신을 가까이 두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 황후가 고려인이라니요. 대단합니다. 그러면 그 두 분은 믿을 수 있는 분들인가요?”

“황실에서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나는 고삐를 다시 강하게 쥐었다. 설원 위를 달리는 말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이제 당신의 가족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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