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봉인한 마음을 비비추 꽃 한 송이에 담다

by 밤톨맘

여명이 채 밝기 전, 나는 황궁 가장 깊숙한 사원으로 향했다. 횃불을 든 시종들이 앞을 열었고, 나는 그 뒤를 숨죽여 따라갔다. 대도에발을 디딘 지도 어느덧 석 달이 훌쩍 넘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태황태후 마마는 황실의 법도를 익혀야 한다며 내게 새벽마다 불공을 드릴 것을 지시했다. 다행히도 날이 더워지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은 새벽부터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곤혹스럽던지. 날이 풀리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혜은 스님, 안녕하십니까.”

차가운 법당 마루에 무릎을 꿇고 혜은 스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새벽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법당 안은 향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숙연한 기운이 가득했다. 스님이 묵묵히 읽어 내리는 불경 소리, 이따금 사원 전체를 울리는 목탁 소리. 그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소리 속에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옴마니 파드메훔.”

나는 제일 먼저 고려에 있을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가 부디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이내 부다시리 공주를 떠올렸다. 혹여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당신을 위해 감당할 소명이 있거든, 이를 깨닫고 기꺼이 해낼 힘을 달라고 기도드렸다.


사원을 향하는 이른 시간, 엘 테구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를 찾아오곤 했다. 멀리서부터 역겨운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내 곁을 빙빙 맴돌더니, 혀가 꼬인 채 낯선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부다시리를 죽였는데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느냐? 네가 가짜임을 난 진즉에 알고 있었다.”

엘 테구스의 말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에 가까웠지만, 그 속에 알 수 없는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의 광기가 나를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카이두 장군이 이 궁 안에 있는 한, 내게 더한 짓은 하지 못하리라.


작은 금잔에 담긴 성스러운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나는 차가운 마루를 박차고 일어섰다. 태황태후 마마가 계시는 궁으로 늦지 않게 이동해야 했다.


“태황태후 마마, 밤새 평안하셨사옵니까?”

매일 아침 문안을 드릴 때마다 태황태후 마마는 의주에 있었던 시절을 캐물었다. 특히, 나의 부모에 대해서는 더 집요하게 물었다. 겉으로는 나를 길러준 은혜를 들먹이며 살갑게 구는 듯했지만,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가짜임을 확신하는 듯한, 싸늘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는 항상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문후 인사가 끝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져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긴 공복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나를 따르는 궁녀들에게 둘러대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곳에 온 이후, 나의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내가 가진 의학 지식도, 아버지께 익혔던 의술도 모두 봉인해야 했다. 그것이나의 정체를 드러낼 씨앗이 될 수 있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허나 그런 날들이 지속될수록 '이로운'은 서서히 지워져 갔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숨이 턱 막혔다. 환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비비추도 자연스레 내 곁에서 멀어졌다. 씻어내야 할 피비린내가 더는 없었으니까. 나를 상징하던 모든 것들이 이 궁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달릴 때만 이 모든 굴레를 잊고 잠깐의 평온과 행복이 나를 찾아왔다. 오로지 달릴 때만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심장이 가쁘게 들쑥날쑥 차올랐다. 훈련장 위에서 말의 거친 숨결과 나의 숨결이 하나가 될 때,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처음 말을 마주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말의 위압적인 크기에 압도되어, 안장 위 나의 몸은 흔들리는 추처럼 좌우로 요동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내리겠다고 손짓했지만, 카이두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엄격했다.


“그리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말은 타는 이의 불안을 가장 먼저 읽어내는 짐승입니다. 흔들림에 저항하지 말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십시오.”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맞춰갔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흔들림이 익숙해질수록, 공포는서서히 희열로 변했다. 고삐를 잡은 손에 미묘한 힘이 실리자, 말은 나의 의지대로 고개를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니 카이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사냥 원정에는 공주님도 나가실 수 있겠습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차가운 황궁의 일상 속, 메말라가던 내 마음 한구석을 살며시 간지럽혔다. 드디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인가. 그때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훈련장을 갈랐다.

“아직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훈련장 입구에서 바야르가 들어서고 있었다. 검은 준마는 먼지를 흩날리며 미끄러지듯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그 위협적인 움직임만큼이나 그녀의 표정은 매서웠다.

바야르는 에르덴과 다르게 나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눈초리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가득했다.


“부다시리의 남은 교육은 제가 맡겠습니다. 요즘같이 변방이 심상치 않을 때, 폐하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야 할 장군님께서 매일 부다시리의 공부까지 도맡아 하신다니요. 장군님의 어깨가 무겁지는 않을지 염려되옵니다.”


바야르는 겉으로는 카이두를 염려하는 척했지만, 그녀의 혐오스러운 시선이 나를 겨눴다. 내가 카이두의 본분을 흐리게 한다는 비난이었다. 황궁 내 공주들 사이에서 나의 이름이 험악하게 오고 가고 있음을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나는 힐끗 카이두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좋을 듯합니다. 이제는 저 혼자 해낼 수 있습니다.”

이미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언제까지나 내 곁에 머물 수 없었다. 더욱이 에르덴 언니와 혼담이 예정된 그가 내 곁에 이토록 오래머무는 것은 오해를 부를 여지가 다분했다. 카이두는 내가 이곳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나를 보필했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 이제는 나 홀로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할 때였다. 나는 고삐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허나 카이두는 바야르의 뼈 있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는 예정된 일정을 기어이 마무리 지었다.그리하여 그의 교육은 며칠 더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면 가르침은 어김없이 나의 별궁 서재로 옮겨 왔고, 마침내 오늘이 그 마지막 밤이었다. 조그만 창 너머로 자욱한 어둠이 깔리고, 고요한 밤공기가 서재 안으로 스며들었다. 내일이면, 그는 다시 차가운 전쟁터로 돌아갈터였다.


“덕분에 원나라 사람이 다 되었습니다.”

입 밖으로 실없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내일이면 그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애써 밀어냈다. 이 무거운 공기를 저타오르는 촛불처럼, 모두 다 태워버리고 싶었다.


“잘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원나라의 역사서와 어학 교본들을 책상 위에 차곡차곡 올려 두었다. 이어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제가 돌아와 틈틈이 확인할 것입니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그의 나직한 음성에는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장군님도 잘 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그의 눈썹 한쪽이 살짝 들렸다. 그게 곧 ‘의아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얼 말입니까?”

“제 걱정 말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전에 숙영지에서 하신 말씀 기억나십니까? 전장에서 누구를 베고 쓰러뜨릴 때,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혹여나 저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실까 염려됩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사람을 베고 쓰러뜨리는 저를 혐오하지 않습니까? ‘이로운’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여인이었지요.”

이로운, 그가 내뱉는 순간, 너무나도 오랜만에 나의 이름을 들은 나머지, 눈물이 차 올랐지만 재빠르게 삼켰다. 오늘 만큼은 그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걱정 없이 전장에 나갈 수 있게 해야 했다.


“단 한 번도 당신을 혐오한 적 없습니다. 그러나 이로운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숙명일 테지요.”

나는 미처 가다듬을 틈도 없이 걱정스러운 말들이 곧이어 터져 나왔다.

“허나 장군님과 함께한 기간 동안 참 많은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당신의 생각, 자라온 환경, 저는 당신을 막아설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을 지킬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당신이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제가 얼마나 열심히 주어진 공부를 잘 해내고 있는지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다른 공주들과도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 보세요.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오라버니 기억하시죠? 오라버니의 온갖 핍박과 유세 속에서도 이겨낸 저입니다.”

“그것이 이겨낸 것입니까? 당하신 게 아닙니까?”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저는 ‘제가 이겼다’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정신승리라 하지요.”

아까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나른한 밤공기와 잘 어울리는 맑은 웃음소리였다.


“장군님께서 하루 종일 제 곁에 있는 바람에 제가 다른 공주들과 사귈 기회를 몽땅 잃어버렸지 않습니까? 어서 가십시오. 제게도 다른사람들과 사귈 기회를 주셔야지요.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의 모든 과업이 부질 없어지구려. 참 재밌는 여인입니다.”

그는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어느새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내 희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원정은 당신의 나라, 고려로 떠납니다. 혹시 제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망설임 끝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답했다.

“비비추 꽃 한 송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차마 그에게 부탁할 수 없었다. 그는 황명으로 그곳에 가는 것이니까. 나는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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