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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Oct 24. 2021

익숙한 비극

마음을 채우는 한끼

어제 오셨던 손님이 또 방문해주셨다. 걸음걸이와 말하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행은 부자연스러워 나는 의자를 빼드렸다. 그리고 어제와 똑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매운탕을 참 좋아해요. 장날에 요 앞에 고기 팔지요. 그걸로 매운탕 끓여주면 내가 사먹을게요."

된장찌개와 매운탕을 해달라는 말씀을 어제도 한참 하셨고, 오늘도 하신다. 나는 된장찌개는 다음 식단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 매운탕은 요리실력이 좀 더 자라면 도전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아가씨라 해야 돼요? 아줌마라 해야 돼요?"

"제가 여기 운영해요. 사장님이라고 해주세요."

"사장님, 요 앞에 ooo 슈퍼에 가서 막걸리 한 병 사다줘요. 3천원 줄게요. 1200원인데 3천원 받으면 남잖아요."


이 아저씨는 이로써 막걸리 아저씨다. 다짜고짜 막걸리를 사달라 하시고 막걸리를 매개로 남의 가게 매출까지 높여주시려 하신다. 막걸리아저씨가 말한 '요 앞의 슈퍼'는 이 일대에서 일어나는 소란의 요람이다. 몇 년 전 바뀐 사장님이 슈퍼 안과 입구에 테이블을 두고 가게에서 구입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가게 뿐만아니라 인근의 식당들도 주로 술을 파는 곳이라 이른 아침부터 만취한 아저씨들이 늘 있다. 술에 자신을 빼앗긴 사람들로 이 거리는 크고 작은 소란과 그 소란을 정리해줄 112 순찰차가 심심찮게 출동한다.


어제도 이 손님은 식당에 막걸리가 없다고 하자, 나에게 슈퍼의 막걸리를 사다달라고 하셨다. 


"안 갑니다. 드시고 싶으시면 사오셔서 드시는 건 이해해 드릴게요."


막걸리 아저씨는 결국, 위태롭게 걸어가셔서 사오셨다. 그 막걸리 한 병이 어떤 사건의 복선이었는지 이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식사하시는 내내, 막걸리는 1200원인데 식당에 갖다놓으면 자신은 3천원에 사먹겠으니 얼마나 이익이냐는 충고와 더불어 다음에는 준비해달라고 하신다. 이윽고 식사를 다 마치신 막걸리 아저씨는 한참을 앉아 계시더니 일어서시며 기우뚱 넘어지시려 하신다. 식당에 있는 우산을 지팡이 삼아 짚고 가시라고 드렸다. 두어발짝 걸으셨을까? 문 밖을 나서자마자 꽈당 넘어지셨다. 놀라서 달려나가 보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온통 젖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계셨다. 긁힌 상처를 옆에는 이미 흉터진 상처들이 많았다. 혼자서는 일으킬 수가 없어 동네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다들 외면하셨다. 내 부탁이라서 거절한 것인지 그 아저씨와 얽히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신기한 것은 그 거리에 당황한 것은 나 혼자였다는 것이다. 바닥에 누워계신 아저씨도 그다지 불편한 기색이 없었고, 구경꾼들도 대수롭지 않게 대하였다. 


그럼... 이제 내 차례가 된 건가?

우리 식당에도 순찰차가 오는 것인가?

사태의 당사자와 주변 분들의 반응으로 보아 119보다는 112가 확실히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핸드폰을 가져와 긴급전화를 눌렀다. 주소지와 상황을 말씀드린 후,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치 선견지명이라도 하듯 시즌1 당시에 인근 식당의 사장님이 식사를 하러 오셔서, 나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고민하지 말고 112에 신고를 하라는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식당 운영을 하다보면 별일이 다 있을 수밖에 없고 생각보다 경찰분들이 세련되게 고충을 해결해주신다며 귀뜸을 해주셨다. 사장님의 조언은 정확하였다.

경찰분들은 사이렌을 켜지 않고 조용히 골목으로 진입하셨다. 주취자의 상태를 먼저 면밀히 살핀 후,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이 들자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경찰분들이 오셔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하나 돕지 않는 상황이 비극적인 것보다 이 분들에게 이 광경이 너무 익숙한 것이 비극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나에게 그날의 경찰분들은 정말이지 민중의 지팡이였다. 


에필로그

영업을 종료하고 매장 정리를 하는데 밖에서 별안간 '쿵'하는 소리가 들려 내다보았다. 막걸리 아저씨가 저녁을 먹겠다며 식당으로 또 찾아오셨다. 배 고파서 밥 달라는 손님을 처음으로 담담히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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