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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Oct 24. 2021

부라보 마이 라이프

마음을 채우는 한 끼

시즌1의 영업 종료를 며칠 앞둔 어느 저녁 영업시간 때였다. 남자 손님 한 분이 들어오셨고, 마침 맞은편 식탁에서 식사를 마친 여성 손님이 나가려 계산 중이셨다. 새로 들어오신 남자 손님은 이미 취기가 있는 상태로 보여 내심 긴장하던 찰나,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여성 손님이 건너편 건물에 살고 있으니 무슨 일 있으면 소리를 지르라고 하며 나가신다. 염려하고 걱정해서 해준 말을 들었는데 애써 모른 척하던 불길함이 사실로 확인받은 것처럼 긴장감이 더해졌다.  

남자 손님은 소주 한 병과 정식을 주문하셨다. 제법 어둑해진 밤이라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다른 손님이 들어오시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지금 오신 손님은 지난 토요일에 만취한 상태로 찾아와 당시 함께 있던 동업자와 나의 관계를 묻고 기타 다양한 자신의 이야기로 한참을 우리를 붙들어놓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불쑥 찾아오셔서는 나에게 당신의 막내 여동생 같다며 부라보콘을 선물하고 가셨다. 딸이라 하기에는 당신이 젊고, 딱 막내 여동생 나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셨다. 재미난 분이라 여기던 찰나, 어느 오후에 이 분이 손에 꽤 큰 드라이버를 손에 들고 욕으로 구령을 붙이며 씩씩 거리며 골목길을 지나가셨다. 건너편 다방에서 사장님께 쫓겨나기까지 하셨다. 이 일대의 블랙리스트로 기억해야 할 인물로 등극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블랙리스트 손님이었지만, 그래도 혼잣말로 중얼중얼 욕을 하며 술을 마시는 남자 손님만 있다가 안면 있는 손님이 방문해줘서 약간의 안심이 되었다. 손님은 정식 포장을 주문한 후, 나에게 메모지와 볼펜을 달라고 하였다. 메모지를 받아 들고 돌아서서 무언가를 적으시더니 음식값과 함께 나에게 건네신다. 


위험하면 112

가슴 아프면 119

그냥 010-****-**** 

ㅇㅇㅇ


뿜을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정자체로 꾹꾹 눌러쓴 진정성에 박장대소로 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손님은 명함을 유유히 남기고 나가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우리 막내 여동생 같다고.


유쾌한 명함 덕에 다소나마 긴장이 해소된 나는 쫄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방으로 들어가 내 일을 묵묵히 하였다. 그 손님은 식사를 하는 동안 젊어 보이는 여자 사장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나는 영업과 관련하여 필요한 질문에만 대답하고 희롱이거나 불필요한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식기세척기의 소란스러운 소리는 곤란한 질문을 피해야 하는 경우,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후드도 마찬가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행히 손님은 식사를 마치고 무사히 나갔고 그 뒤로 두어 번 더 찾아와서는 자신이 우산을 놔두고 간 것 같다며 우산이 없는지 묻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에게 명함을 건네준 손님은 그 뒤로도 꾸준히 식당을 이용하고 계신다. 어느 날인가는 무엇이 먹고 싶냐며 사다 주겠다고 하셨다. 정중히 거절하였으나 떡을 한 팩 사다 주고 가셨다. 주신 떡은 오신 손님들과 오병이어처럼 나누어 먹었다. 이 손님의 별명이 필요한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시즌2를 오픈한 후, 한 주에 한 번 찾아오시는 손님이 있다. 시즌1의 장렬한 폐막을 목도한 후로 일부러 찾아와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손님이신데 이 손님이 식사를 하는 와중에 명함을 건네준 손님이 대낮에 만취가 되어 식당을 찾아오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식사 중인 손님에게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맞죠! k1에서 하얀 빤스 입고 싸우는 사람!"

이라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강경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의 분명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내가 모르는 이 손님의 정체를 알게 된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너무 신나서 껑충껑충 뛰다시피 하는 아저씨는 손님에게 싸인을 요청하였다. 나는 식당에 있는 종이와 매직펜을 가져다 드렸다. 손님은 사인을 해줬고 아저씨와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k1 손님의 밥값이라며 5만 원을 주고 가셨다. 두 사람의 밥값을 계산하고도 남는 금액이므로 선불로 달아놓으려면 기록이 필요했다. 동네 주민에게 처음 받아본 선물을 건네준 아저씨. 아저씨가 선물해준 '부라보콘' 종이의 맨 윗단에 


부라보 아저씨, 선금 5만 원  


이라 적었다. 


짐작하듯 부라보 아저씨가 스타를 만난 줄 알았던 손님은 k1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다음 날 술이 깨어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며 어제의 나를 후회하실 테지만, 오늘의 부라보 아저씨는 그토록 만나고 싶던 스타를 조그마한 식당에서 대면하여 사인에 사진까지 찍어 기쁜 마음에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셨다. 행복이라는 딱히 정의하기도 실체를 집어내기도 어려운 키워드가 평생 우리를 괴롭힌다. 부라보 아저씨의 오늘처럼 행복은 착각과 허상 그 어디쯤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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