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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Dec 08. 2021

대선 후보 관찰법

속 시끄럽지만, 우리가 뽑아야 하니까! 들여다봐야 한다

귀농하여 3년 동안 책 한 권을 읽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장 심각하게 드러난 증상은 '걱정이 익숙해지고 생각은 둔해진 것'이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고된 노동에 치여 걱정과 한탄이 늘어갔다. 걱정을 제공하는 원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걱정하며 종국에는 귀농이라는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열심히 기술교육센터의 교육을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분절적이고 지엽적인 부문 기술 교육에 국한되어있어 농정에 대한 전체적인 안목을 키우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농산물 수급 불균형, 농산물 가격 안정, 기후위기에 따른 농업 환경 변화 등 숱한 어젠다들이 얽히고설켜 작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나의 삶을 뒤흔들고 있었다. 걱정의 뿌리를 직면해야 했다.


걱정 말고 생각하는 훈련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2019년 가을, 생활인의 생존 철학을 함께 할 벗들을 찾아 나섰다. 어찌어찌 모인 회원들과 2022년부터는 (겁도 없이) 논어를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모임지기인 내가 먼저 많이 쓰는 성실함이라도 보이고 싶어 2007년부터 책꽂이 장식용으로 하나 둘 사모은 <논어> 관련 책들을 모조리 펼쳐놓고 한글 떼는 심정으로 더듬더듬 따라 적으며 읽어 나갔다.


子曰(자왈)
視其所以(시기소이)하며,
觀其所由(관기소유)하며,
察其所安(찰기소안)이면,
人焉廋哉(인언수재)리오?
人焉廋哉(인언수재)리오?

<논어> 위정 편 10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의 사귀는 친구를 조사하고,
그가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을 관찰하며,
그의 마음이 무엇에 편안해하고 무엇에 불안해하는가를 이해하면,
그 사람됨이 어찌 숨겨질 수 있겠느냐?
그 사람됨이 어찌 숨겨질 수 있겠느냐?

박종연 선생 옮김, <논어> 을유문화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 하는 것을 보며
그 이유를 살피며
그 편안히 여김을 살펴본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 수 있겠는가?

성백효 선생 역주,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대선 캠프와 후보 당사자들에 대한 기사가 하루도 쉬지 않고 터져 나온다. 메시지가 틀린 것인지 메신저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앞 뒤를 맞춰볼 겨를도 없이 기사를 읽어내기도 벅찰 정도다. '투명성'의 사회. 조금만 성실하게 검색을 해보면 관심 있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세상이다. 숨기기 어렵지만, 그래서 정확히 알기도 어려워졌다. 최초의 메시지가 오류일 경우,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퍼지기만 하기도 하고 퍼뜨린 것을 없던 일로 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테고. 작심하고 잘못된 메시지를 뿌려댈 경우 빛의 속도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시대이니.


쏟아지는 정보를 다루는 우리는 피곤할 수밖에 없다!

오늘 이 기사를 보고 공감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는데, 내일 그 기사가 조작일지도 모른다는 다른 기사를 보며 어제의 내 공감이 호구로 변신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기후, 산업, 생활양상이 상상도 못 할 속도로 변하고 있는 대 혼돈기를 지나가자면, 리더가 필요하다. 북극성이 제 자리를 잡아 뭇 별들이 그 주변에 위치하는 것처럼(논어 위정 1장) 혼돈의 시대에 정확한 현실 판단으로 안개 너머의 햇살을 제시하며 운행해 줄 리더가 절실하다.

그래서 속 시끄럽지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봐야 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하는 행위를 보고,

그 행위의 과정을 살피고

그가 그 행위를 진정 편안한 마음으로 행하였는가를 살피라 하셨다.


모든 사건에는 이면이 있다. 없는 사실을 지어내며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하게 된 과정'을 보아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와 '그렇게 하는 것밖에 모르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성찬인들 '개 돼지 먹일 생각'으로 차린 것이라면 그 밥상을 받는 내가 비참한 것이 아니라

밥상을 차린 그가 비루할 것이다. 비틀어진 자신을 알지도 못한 채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꾸역꾸역 해야 하니 말이다.


아! 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桯子曰(정자 왈)
 在己者(재기자)를 能知言窮理(능 지언 궁리) 면
則能以此察人(칙능이차찰인)을 如聖人也(여성인야) 니라

정자가 말씀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지언하고 궁리한다면
이것으로써 남을 관찰하기를 성인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백효 선생 역주,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p64 위정 11장 주석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눈에 따라 천차만별로 보인다. 암흑 같은 혼돈의 시대에 두 눈을 제대로 뜨지 않아 등대를 놓치지 않도록 당신과 내가 내 안에 있는 욕망과 희망을 먼저 살펴보자. 나에 대한 성숙한 관찰이 결국 안목으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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