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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Jan 03. 2024

자기진단1. 내가 제일 나빴다

과거의 나에대해 길게 늘어놓았던 글을 지웠다. 사실과 감정을 오가며 나의 기억으로 빚어낸 드라마의 구슬픈 주인공으로 배설하듯 뱉어놓은 글이 마뜩치 않았다. 그래도 과거의 사실과 그 안에서의 감정 사이를 헤집고 나오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나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툭하면 튀어올라 정진하려는 발걸음을 붙잡는 과거의 어떤 장면들을 그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꾹꾹 눌러놓기만 하면, 가스가 꽉 찬 발효주처럼 뒷일을 감당하기에 벅찬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그일들을 뿌리째 뽑아보겠다고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곤란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과거라는 미로에 빠져 나오기 어려웠다.


몇 해전,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당시에 우리집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 홀로 있었다. 걸어서 15분 남짓 되는 곳에 있는 이웃집에서 기분 좋게 술 한잔을 했다. 자고 가라는 이웃의 말을 뒤로 하고, 그 밤에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길을 나섰다. 마늘비닐 위로 쌓인 눈에 비친 달이 무척이나 빛나던 황홀한 밤이었지만, 들판을 둘러싼 산과 그 사이로 부는 칼같은 바람으로 나는 이내 두려움에 짓눌렸다. 잘 구획된 논들의 사잇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데, 두려움에 방향감각을 잃었다. 마당에 켜놓은 불빛이 없었다면, 멀쩡한 길 위에서 길을 잃을 뻔 했다.

내면, 무의식, 자존감이 그렇다. 이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손에 잡을 수는 없다. 잡으려 찾으면 찾을수록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깜깜한 골목길,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아빠를 피해 맨발로 웅크리고 있었던 그 밤이, 삼십년이 지난 아직도 가끔 기억난다. 거듭된 실패로 무기력이 학습된 아빠는 술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고, 그런 자신에 대한 좌절과 열패감을 엄마와 우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도망쳤다. . 어느 날인가는 밥솥 하나만 가지고 근처 여인숙으로 엄마는 우리들을 데리고 나왔다. 돈을 구하러 갔는지, 다른 볼일을 보러 가셨는지 우리만 여인숙에 남겨놓고 엄마는 어딘가로 가셨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었을텐데, 나는 엄마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엄마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빠의 주먹질로 한움큼씩 빠지는 엄마의 머리카락에 우리들의 발을 꽁꽁 메어놓은 것 같았다. 고작 마흔을 넘긴 엄마는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품느라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라면봉지를 사서 돌아왔고, 우리는 밥솥에 라면을 끓여 저녁을 떼웠다.


엄마의 짐을 어떻게든 덜어드리고 싶었다. 혼자서 생계를 감당하느라 기미가 잔뜩 낀 엄마얼굴이 과로로 허옇게 되지 않도록, 친척집을 찾아가 겨우 입을 떼며 돈을 빌리지 않도록, 한번쯤은 활짝 웃을 수 있도록 해드리는 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은 혼자 오지 않았다. 돌봄을 받지 못한 태가 나는 아이는 어른에게도 또래에게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되기 쉽다. 똑같은 잘못인데 유독 나에게만 냉정했던 담임선생님의 매서운 눈초리, 집으로 놀러온 것을 반기지 않던 윗집 아줌마의 표정,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따돌렸던 반 아이들... 엄마가 견디는 고통의 크기만큼 내가 견뎌야하는 아픔도 그만큼 커져갔다. 엄마, 언니, 동생,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처들을 안고 버텨내고 있었다.  


일찍 철이 든다는 것은 분수대로 꿈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던 가정환경과 그 속에서 겪은 일들이 곧 나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렇게 정해진 가치가 품을 수 있는 꿈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믿어버렸다. 내 삶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이들이 했던 무례하고 차가운 기준으로 나를 스스로 맞춰버렸다. 내게는 어느 감리교회 여신도회에서 달달이 보내준 후원금과 어린이날에 불러 월급에서 떼어낸 돈으로 만든 장학금을 주신 담임선생님, 처음 본 내게 흔쾌히 대학 등록금을 내준 어떤 어른들이 있었다. 내가 견디는 아픔만큼 어떻게 비롯된 인연인지 알 수 없는 치유의 손길이 존재했다. 어린 날의 나는 따뜻한 치유보다 송곳같은 자극에 쉽게 주눅들어 스스로를 눈치로 만든 유리천장 속에 가두었다. 좋은 것들은 내것이 아니라 여기고, 지레 겁먹고 뒤로 물러섰다. 나를 함부로 한 내가 제일 나빴다.


    


  

20대 중반, 대학을 늦게 졸업하고 시골의 공부방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스무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 당시에는 녹록치 않은 사정에 처한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태어나보니 이미 주어진 불행과 위험에 처해봤던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얼굴이 있다. 밥을 굶지 않아도 얼굴에 버즘이 피어오르는 것은, 손을 씻어도 손등이 갈라지는 것은...채워보지 못한 안정감 때문이다. 그때의 나처럼.


4년 정도의 근무기간 동안, 다시는 못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아이들을 대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당시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소명의식으로 일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이들에게 어린시절의 내가 만나고 싶었던 어른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는 도움, 굳이 아픈 곳을 들춰내지 않는 대화, 따끔하지만 따뜻한 충고, 때가 낀 손톱을 살펴봐주는 보살펴주는 어른...


다 말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유년시절로 누구나 자라지못한 내면아이가 있다. 내면아이를 다루는 방법들을 생각해보려 북클럽 회원들과 <나의 운명사용설명서>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회원들과 내면아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인연을 통해 치유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도시고향을 떠나 굳이 첫 직장으로 시골공부방을 찾아들어온 20대의 나는 어쩌면 고프고 아팠던 어린 나를 돌보고 싶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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