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생으로 돌아오다
본래 2월 4일 연재를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오늘 연재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리즈를 준비합니다.
1. 프로데뷔반
대학로에서 상업 공연을 올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울 쪽 회사와 학원들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눈에 걸린 단어 "프로데뷔반"이라는 단어에 꽂혀 학원 근처에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시기 운이 좋아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살던 지역에 마침 근처에 관련 분야 회사에서 공석이 생겼다며 연락을 줬기에 일이 착착 풀려나갔다.
회사를 이직하고 전세를 알아본 뒤 학원에 오디션 영상을 보내고 합격 문자가 날아오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기분이었다. 회사에 들어갔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업배우의 삶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는 막 이직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배우의 삶도 하나의 이직이라 생각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프로데뷔반의 인원 모집이 지연되면서 실제로 들어간 것은 합격 문자를 받고 두 달 정도 뒤에 첫 수업을 들어가게 되었다. 첫 수업 시간에도 인원 모집이 완료된 상태는 아니었던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인원들이 보충되기 시작했고, 공연팀의 인원 구성이 완료된 것은 또 몇 달의 시간이 더 지나 공연을 한 달 반 정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정작 공연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부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오디션을 통해 남자 주인공 배역을 받는 것은 성공했지만 이 배역의 특성상 대사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혼자 진행하는 씬이 많아 내가 스스로 채워나가야 할 장면들이 많았지만 극의 대사와 노래를 흡수하는 데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어느 순간 난 연습실에 나가는 것이 힘겨웠고 두렵게 느껴졌다. 연출, 팀원들, 다른 친구들의 눈치가 보이고 있었다.
내 나이는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이었지만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군대에서 겪었던 불안하고 긴장했던 그때의 마음과 비슷했다. 연습실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고, 고등학교 때 어려워하던 수업 시간을 맞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 공연이 올라가는 데에 두 달 정도가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중도에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2. 하차하고 싶어요
연습 전 짧은 시간에 빠르게 몸을 풀기 위해 하는 '컵차기'를 했었다. 함께 하는 배우들이 모두 둥글게 자리를 잡고 제기를 차듯이 종이컵을 차 서로에게 넘기고 떨어진 컵을 밟으면 벌칙을 주는 방식으로 몸을 풀면서 친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컵차기를 하던 중 뒤로 몸을 움직이다 뒤꿈치로 연습실 벽을 찍었는데 발뒤꿈치 모양으로 연습실 벽이 파여 들어갔다. 눈으로 보기에 0.5mm 정도 파여 들어간 것으로 보였고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60만 원이라는 비용 청구를 받고 놀랐다.
비용을 지출하자 회의감이 몰려왔다. 당장 학원비도 적은 비용이 아니었는데 생활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줄여 지내고 있던 중 큰 부담이 느껴졌다. 어렵게 고민하던 중 대표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개인사정상 부담이 커져서 하차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 배우 모집이 끝나지 않아서 지금 하차하는 게 피해가 적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대표는 담백하게 받아들였다. "개인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팀에 피해가 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신 뒤 알려주세요."
집에 오는 길 많은 고민을 했다. 이미 내 마음이 하차로 많이 기울어졌지만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올라왔던 내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것 같았다. 과연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그만두는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도 옳은 선택이었을지 확실히 서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을 더 고민한 끝에 계속해보기로 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면 만나고 있는 사람과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배우꿈을 접어두고 바로 결혼을 준비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후회를 하더라도 끝까지 해보고 후회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하차를 번복하고 끝까지 공연팀과 함께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나와 같은 배역을 준비하던 친구가 공연을 3주 남겨놓고 갑작스럽게 '너무 힘들고 어렵다.' 라며 하차를 했을 때는 기분이 참 묘했다. 그 친구는 내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만두는 것을 아쉽다고 힘내자던 친구였다.
3. 뛰어난 리허설은 본 공연에서 나오지 않는다.
공연이 2주 남은 시점이었다. 연출과 팀원들과 진지한 대화 끝에 우리 팀의 문제는 '내가 너무 실력이 올라오지 않는다.' 더 노력이 필요하고 적극적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함께하던 페어들의 솔직한 이야기와 연출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이 극을 내가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착잡하고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 주 전체 배우진은 주말에 모두 모여 주말 밤샘 연습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 모두가 연습실에 모여 다음날 일요일에 헤어지는 일정. 그 한 주를 홀로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다. 내 안에 어떤 스위치가 눌렸다. 계기는 단순했다. 런쓰루(리허설) 직전 내가 연습하는 장면을 보고 학원의 대표가 지적해 준 몇 가지가 내 머릿속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명료했다. 그리고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그날 밤 12시 반부터 시작된 우리 페어의 리허설은 새벽 2시 반에 끝났고, 난 그날 내가 살면서 해왔던 모든 칭찬보다 더 많은 칭찬을 들었던 것 같다.
대표는 "경이로운 런(리허설)이었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가장 기대할 수 있게 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모든 장면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납득이 돼서 대사와 노래가 대본에서 벗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연출의 "연출하길 잘했다. 제가 이 극을 연출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최고의 찬사까지 들었다. (심지어 이때의 런 영상과 피드백 영상을 핸드폰에 늘 갖고 다니며 가끔 보며 내 자존감을 찾는다.)
그날 난 처음으로 연기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대표는 이어 말했다. "이런 퀄리티의 공연은 본 공연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그걸 알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내게 저주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 난 본 공연에서 그때만큼의 연기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내가 가진 꿈을 드디어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4. 꿈. 아름답고 안타까운 그 단어
내가 했던 뮤지컬은 주인공이 꿈을 쫓아가다 자신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도 잃게 되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만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친구로 인해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이야기를 가진 내용이었다. 뮤지컬 프로데뷔반 배우에게 와닿는 내용의 서사를 갖고 있었다. 이 극을 직역하는 과정이나 우리나라의 문화와 다른 부분들을 흡수하는 것은 조금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 극에 빠져들수록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진짜 내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어쩌면 이 단어를 담을 만큼 내가 가진 꿈의 의지가 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변명으로 내 현실 도피적인 삶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은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인공조차 현실의 벽을 느끼는 장면이 조금 더 내게 와닿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마지막 데뷔 공연날. 앞으로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대에서의 졸업. 그리고 이 꿈의 길을 다시 우습게 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대본과 악보를 펼치는 그 순간이 너무도 무섭게 다가올 것 같았다. 전업배우로의 삶을 당연히 포기해야 했다. 이제는 내가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보다 무대를 온전히 보면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 브런치북에서 적어간 관극 기는 내가 본 뮤지컬들 중 약 20% 정도 되는 것 같다. 더 많은 관극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나의 이야기와 엮어서 쓰다 보니 나의 이야기를 함께 적어갔다. 이번 브런치북은 조금 더 심도 있게 고민하지 못하고 적어 내려간 것 같은 아쉬움이 있지만, 다시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서 마무리 짓고자 한다. 이번 꿈은 결과가 아름답지 못했지만 아직 나의 꿈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빨래 - 서울살이 몇 핸가요? Rep. 중
서울살이 여러 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 론 가요
나의 꿈 달아서 지워진 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빨래처럼 흔들리다 떨어진 우리의 일상이지만
당신의 젖은 마음 빨랫줄에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털털 털어서 널어요
우리가 말려 줄게요.
잠시 쉬고 새로운 시리즈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