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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나 Aug 22. 2023

엄마에게는 나만의 무인도가 필요하다

1.     


천하태평이다. 일곱 살 난 우리 집 작은 남자 이야기다.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라고 네댓 번은 말한 것 같다. 눈앞에 갈아입을 옷을 대령해도 소용이 없다. 뭐하길래 여전히 잠옷 차림인지 궁금해서 보니 혼자 낄낄대며 자기 다리에 매직으로 장난을 치고 있다. 요즘 푹 빠져 있는 어몽어스 캐릭터를 발등에다 문신처럼 새기고 있는 중이다. 속이 터진다. 어린이집에 늦으면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으니까 서두르자고 하는데도 안 통한다. 민폐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다가 열에 받쳐 흥분한 건 이번에도 내 쪽이다. 지각은 그저 엄마의 과제이자 고민일 뿐이다.      

“터전(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부르는 명칭) 생활 네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거냐?”

“매일 이렇게 지각해서 내년에 초등학교나 갈 수 있겠냐?”      

로 시작된 잔소리는 결국,      

“네 인생의 주인공은 너지,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어.” 로 끝이 나고 만다. 자조력 낮은 애랑 자식 일에 참견 못 해 안달 난 엄마가 함께 살다 보면 아침마다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특별한 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아이는 결국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서야 현관문을 나선다. 구부정한 어린이의 뒷모습에 괜스레 안쓰럽다. 아이 소원이 화내지 않는 엄마랑 살아보는 거라고 했는데.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려 내일부터는 지각하지 말고 잘해 보자고 아이를 한 번 안아주려는 순간, 아이는 인사도 안 하고 터전 안으로 달려간다.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오랜만에 등원한 것이다. 혼을 낸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엄마의 쓴소리는 또 허공에다 대고 하는 혼잣말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집안을 스캔한다. 테이블에 놓인 미숫가루 컵과 과일 접시를 싱크대에 집어넣고, 어질러진 레고 조각을 상자에 담는다. 익숙한 듯 빨래 바구니를 집어 들고 세탁실로 가며 뚜껑을 열어본다. 쉰내가 진동을 한다. 이건 분명 같이 사는 큰 남자의 소행이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다른 옷과 섞이면 곰팡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다용도실에 바로 갖다 놓으라고 수십 번은 말한 것 같은데. 내 말을 안 들은 거다. 옛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한 귀로 듣는 척하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은 이 집안 남자들의 유전인가 보다.      

아침부터 물 한잔도 못 마시고 종종거리는 나를 보고 있자니 오늘따라 서러운 기분이 든다. 들고 있던 무선 청소기의 파워 버튼을 꺼버린 채로 바닥에 누웠다. 괜찮다가도 무너지듯 주저앉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끝이 없는 중노동의 반복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날. 체력이 바닥을 치는 날에 특히 더 그렇다. 아직 내 진짜 본업인 집필 노동은 시작도 못 하고 있는데, 가사노동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린 기분이다. 나는 어쩌자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기어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다.      


삶에도 멈춤 버튼이 있다면 오늘 같은 날은 잠깐 누르고 싶다.

나에게도 필요해, 포즈.     


집안일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대가 없는 노동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집에서 잘 쉬고 있어.”      

남편은 주로 집에서 일하는 아내를 배려한답시고 이런 식의 인사를 건넨 다음 집을 나선다. 무심히 건네는 이런 말들은 참 서글프다. 내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 받지 못 하는 것 같아서.      

하늘을 보니 까만 구름이 가득하다. 아마도 오늘 내가 날궂이 하려나 보다. 밥풀 붙은 그릇도, 냄새나는 빨래도 없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은 날이다. 거기에다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이라면 더 좋겠다. 잠깐 가서 눈 붙이고 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곳이 현실에 존재하기나 할까. 아마도 있다면 그곳은 무인의 섬 어디쯤. 판에 박힌 말이라도 할 수 없다. 엄마에게는 나만의 무인도가 필요하다.           



2.      


출산은 고립이란 단어의 대체어다.      

아이를 낳자마자 자발적으로 산후조리원에 들어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대한민국 법이 그런 것처럼 그랬다. 조리원 동기를 사귀어 졸업한다는 건 남의 동네 이야기였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포기했고, 철저하게 분리된 작은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미역국도 혼자 먹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혼자 보고, 출산 후에 느낀 막막한 우울함과 공포에 대한 감정을 삭힐 때도 당연히 혼자였다. 나는 섬 안에 갇힌 사람이었다. 그곳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외딴 섬이었다. 손안에 작은 휴대전화를 구명보트인 양 꼭 움켜쥔 채 구조될 수 없을 것 같은 그 곳에서 긴 시간을 견뎠다. 조리원을 나오자 본격적인 나의 무인도 생활이 시작됐다. 이번엔 나를 전적으로 버팀목 삼아 의지하는 작은 생명체와 함께였다. 그 고독한 섬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아이의 옹알이와 간간이 들리는 라디오 디제이의 음성뿐이었다. 육아란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이야긴데도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늘 잠이 부족하고, 온 몸이 아프고, 밥한끼 제대로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좋아하는 텔레비전도 못 보고, 사람들도 마음대로 못 만났다. 세수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점점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섬 안에 갇힌 사람처럼 답답했다. 그들은 육지의 언어로 이야기했고 오랜 섬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그들 사이에 섞이기 어려웠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조차 나를 남편의 아내 또는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나에게는 분명 이름이 있는데도 말이다. 외롭고 쓸쓸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외롭고 쓸쓸하다는 나의 호소는 예민한 여자의 히스테리로 둔갑했다. 아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무럭무럭 자랐고, 함께 사는 남자 또한 꾸준히 성장했다.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해질수록 내가 점점 사라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이 내게 주는 행복은 내 것이 아닌 듯 어딘가 허전했다. 그들은 스스로 터득한 방법으로 가끔씩 섬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일을 반복했다. 섬 안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는 건 이제 나뿐이었다. 아내와 엄마라는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던져줄지도 모를 밧줄을 기다리며 그 섬 근처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때 나를 살려준 것은 놀랍게도 단어와 문장이었다. 처음 시작은 육아서였다. 아이를 키우다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 병원 대신 내 정신을 붙잡아준 건 다름 아닌 책이었다. 아이가 읽다 남긴 그림책을 보며 웃었고, 소설책을 읽으며 울었다, 그리고 펼쳐보지 못한 꿈을 꾸고 싶을 땐 남들이 쓴 희곡을 읽으며 미래를 계획했다. 당장에 읽지도 못할 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이 언젠가는 내 지식의 자양분이 될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쓰지 못해 죄책감이 든 날에는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책을 읽었다. 그러고 나면 조금 살 것 같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타이머 소리에 정신을 차려본다. 가스렌지 위에서 끓고 있는 행주를 건져내야 한다. 아이가 진흙에 문질러 엉망으로 만들어 온 양말이랑 바지도 빨아서 널어야 하는데. 그리고 식탁 앞으로 가서 앉아야지. 대본 작업을 위한 시놉시스 마감기한이 며칠 안 남았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손이 느린 나는 아직도 남아있는 집안일 앞에서 한숨이 먼저 나온다. 얼마 전에는 작업과 살림을 병행하며 지친다고 짜증을 내는 내게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그런다.      

“아이 조금만 더 크면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글만 써”      

아이 키우느라 애쓰고 있어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저런 식으로 하는 거겠지. 

젖은 빨래조차 제대로 처리 못하는 주제에 저런 말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 이 많은 집안일을 놔두고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글만 쓰냐고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내 팔자에 글은 무슨 글이냐면서. 남편은 가끔 세상에 당연한 것들이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각 잡아 개켜진 속옷과 양말, 먼지 없는 바닥, 수납장에 잘 정돈되어있는 수건이 당연한 건 줄 아는 사람.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도 주부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나도 남편처럼 글 쓰고 공연만 하고 싶다고 구시렁대며 설거지를 마쳤다. 남편의 무거운 어깨를 배려해 줄 여력이 내겐 남아있지 않다. 지금 내가 갇혀 있는 이 섬에서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까.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아이가 내 옆으로 오더니 귀에 대고 말한다.     

“엄마, 많이 힘들었겠다. 엄마도 상 받고 싶고, 연급(아이는 연극을 연급이라고 발음한다)하고 싶었을 텐데. 나 키우느라고 못 하잖아. 근데 엄마 글 쓰지 말고 자유로 살아. 엄마 글 쓰는 거 많이 힘들어하잖아.” 

많이 컸네. 웃음이 나온다. 글이 안 써진다고 아이 앞에서 꽤나 징징거렸나보다. 

그저 말이 안 통하는 작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람을 위로할 줄도 안다. 문득 희망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육아라는 이름의 무인도에서 곧 탈출할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금방 다시 털고 일어나 내가 가진 장비를 재정비해야지.      


겨우 무장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딛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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