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차 - 비자발적 장기투자자의 변명
11일 차 - 비자발적 장기투자자의 변명
몸무게 68.1 kg, 체지방율 16.8%
(몸무게 6.1kg, 체지방 3.7% 감소)
어제와 몸무게 변화는 거의 없다. 체지방도 마찬가지다.
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몸에 수분이 차오르고 피부도 투명해졌다.
저절로 몸이 참 좋아하고 있구나 느껴지면서, 동시에 내 몸의 소리에 참 무관심했구나 반성하게 된다.
단식 10일이 넘어가면서 생긴 변화 중 가장 큰 부분은 수면의 질이다.
아직도 위산 역류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몸을 비스듬히 세운 상태로 잠을 청하고 있지만, 그런 수면자세에도 불구하고 숙면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아니 그보다 더 이른 새벽 4시 30분경에는 눈이 저절로 떠진다.
그리곤 곧바로 스마트폰의 주식창을 열어서 간밤의 미국 증시를 확인한다.
지금으로부터 3 년 전, 주식 입문과 동시에 비자발적 장기투자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로, 미국 증시를 확인하는 것이 하루 첫 일과가 되었다. 특히 미국 10년물 국채금리, 나스닥, S&P 500등 주요 지수를 확인하는데, 그 지수의 등락에 따라 나의 기분도 아침부터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역류성 식도염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대체로 첫째가 스트레스요, 둘째 무절제한 식습관, 셋째 뱃살로 인한 복압상승을 꼽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주식이 스트레스를 잉태했고, 스트레스가 무절제한 식습관을 낳았으며, 결국 꼴 보기 싫은 뱃살로 성장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역류성 식도염은 주식 때문에 발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꽤 좋은 수익을 올렸었다.
주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코로나 팬데믹 직후였기 때문에 주가는 계속 우상향 했고 꽤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사실 그때는 옆집 개도 주식으로 사료값을 벌던 때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내 능력인 것 마냥 자아 도취해 있었다.
한 달에 월급보다 많은 돈을 벌다 보니 드디어 직장을 떼려 치우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 허황된 꿈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체 2년이 걸리지 않았다.
2021년 말부터 미국의 금리인상과 더불어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은 손실을 손절하지 못하고 물을 탔다.
왜 그랬을까.. 그냥 그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리고 분명 다시 오를 것만 같았다.
실탄이 떨어지자 신용을 끌어다 쓰기 시작했고, 여러 잘못된 선택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손실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이에 나는 점점 겁을 상실하고 마이너스통장을 지르기 시작했다.
신용담보대출 비율을 맞추려고 매일매일 급급해하면서도, 가슴속 저 아래에는 다시 오를 거라는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타짜의 정마담이 말했다.
"화투판에서 사람 바보로 만드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희망입니다. "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활비를 메꾸기 위해 카드론까지 끌어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X발.. X 됐구나
이미 상황이 최악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아내에게 고백을 했고, 부모님과 처가댁에도 이실직고를 했다.
그리곤 부모님께 드리던 용돈을 포함한 모든 지출을 끊었다.
문화생활을 중단했고, 생활비 지출을 최소화했다.
그리곤 지금도 열심히 빚을 갚고 있다.
어두웠던 통로를 지나고 그 길 끝에 실낱같은 빛이 비치어올 때, 마이너스 통장에 빚이 아주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이 세상에는 쉬운 돈은 없다.
땀 흘린 정직한 노력에 비례하는 돈이 있다.
그리고 간혹 개인의 인기와 능력으로 따라오는 돈이 있다.
능력 또한 천부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노력에 의해서 성취된다.
주식에서의 능력이라면,
조금 더 많은 수익 앞에서도 멈출 수 있는 능력
큰 손실 앞에서도 손절할 수 있는 능력
내 실수를 인정하고 과감히 실행하는 능력
나는 정말이지.. 능력이 있다고 착각했던 무능력자였다.
가끔, (아니 가끔보다는 더 자주) 내가 주식 계좌를 처음 열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대박 2회 차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아니, 대박은 집어치우더래도 처음 주식 어플을 깔던 그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그때의 나를 막고 싶다.
물타기와 신용의 무서움을 몰랐던 겁 없고 어리석었던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겨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망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갑자기 속이 쓰리다.
알약을 한알 삼켰다.
X발.. 역시 주식이 문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