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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 기행] 독일로부터 '폴란드'를 되찾기까지

<브로츠와프 궁전>, 폴란드 속 다문화의 정수

by 흑투리

투리의 글을 찾아온 것을 환영한다! 투리와 같은 MZ세대, 혹은 잘파 세대라면 가끔 이런 유튜브 댓글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 할아버지는 왜 이런 곳에 터를 잡아서..."

"어쩌다가 위치 선정을 이리 빡세게 하셨습니까, 단군 할아버지"


사실 단군 할아버님이 처음 땅을 세운 곳은 요동반도라서, 그분이 환생하셨더라면 좀 억울해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외세의 침략이 많았던 한반도의 역사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웃픈 영토 설정을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이 유일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인스타 쇼츠에서였나, 쇼츠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 중 위치 선정이 안 좋은 나라로 가장 먼저 나온 곳이 폴란드였다. 반면 위치 선정이 좋은 나라로 가장 먼저 나온 곳은 독일이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가 뭐냐. 우리나라가 일본이랑 중국한테 고생했던 것처럼, 폴란드도 상대적으로 열강인 독일이랑 러시아한테 엄청 고생했다는 얘기다. 특히 우리나라는 근현대 시대에는 일본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지 않은가? 오늘은 한국과 유사하게 독일의 지배력으로부터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폴란드, 그중에서 '브로츠와프'라는 도시의 몸부림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브로츠와프 지배 시절 유물들




<브로츠와프 궁전>, 달리 말하면 <브로츠와프 시립 박물관>라고도 하는 이곳. 여기의 절반 정도는 다양한 문화권이 교차했던 '브로츠와프'의 역사와 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도시의 형성 과정부터 합스부르크 지배 시기까지가 딱 그 내용이다. 그 부분은 투리가 다른 글에서 얘기를 했으니, 여기에서는 그 이후의 전시관들을 보여주면서 (투리가 아는 대로) 브로츠와프의 역사를 정리하려 한다.


슬프게도 여기에서 투리는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투리가 갔을 당시 특정 시대의 전시관을 하나도 발견을 못 한 것인데, 브로츠와프는 합스부르크 시대 이후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 하에 놓인다. 특히 가장 눈여겨볼 시기는 프레드리히 2세(Frederick II, 재위 1740–1786)의 통치 기간인데, 투리의 기억에 해당 전시관은 빠져 있었다(아님 투리가 빠가라서 발견을 못했을 수도). 두 번째는 투리가 갔던 전시관 순서가 이후부터는 좀 뒤죽박죽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떻게 글을 이어갈까 고민을 좀 해봤는데, 어차피 글에서 중요한 건 연속성. 필자와 독자의 모두의 편의를 위해, 투리는 '의식의 흐름'을 버리고 '순서'를 택한다. 글은 짧고 가독성 있게, 사진은 적절한 타이밍에 배치! '시대순 설명'은 위의 명제를 지키기 위한 포석과도 같은 것.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




브로츠와프 출신 유명인들을 모아놓은 전시관




비록 사진은 없지만 배경설명을 위해 프로이센 시기의 초기 내용을 간략히 다루어보자. 이 시기가 딱 브로츠와프의 독일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라,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혹시 본인의 글이 지루해진다 싶을 때 꿀팁 하나를 주자면, 독일을 일본, 폴란드를 조선에 치환해 보자. 효과가 꽤 있을 것이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당시의 브로츠와프는 그전부터 이미 독일계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어서 조선의 역사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오히려 브로츠와프 자체는 프레드리히 2세 덕분에 번영을 누렸다고 봐야 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브로츠와프를 프로이센에 편입시켰던 당시의 왕은, 브로츠와프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행정과 교육을 대폭 개혁했다. 그 결과 브로츠와프는 프로이센 동부의 영토 중에서는 최고의 도시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이주도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유대인 공동체도 성장한다. 반면 폴란드계 주민들은 언어도 문화도 다르니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 침공에서부터 1848년 혁명기까지의 전시관




어쨌든 이제부터 전시관 탐방 시작이다. 좀 더 빠른 이해를 위해 0층보다 1층의 전시관들부터 먼저 둘러보자. 사진 위의 전시관을 보면 그 뒤의 브로츠와프 시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침공부터 1848년 혁명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폴레옹.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 그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을 빠르게 장악하기 시작하는 시대가 바로 해당 전시관의 시작 부분이다. 비록 지배당한 기간이 1년도 안 되었지만, 브로츠와프는 이때 잠깐이나마 프랑스의 소유였다. 조약을 통해 브로츠와프를 다시 돌려받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크게 경각심을 느낀 프로이센. 프로이센은 바로 행정, 군사, 사회 등 여러 부분에서 대대적으로 개혁을 단행한다.




전시관의 당시 계층 사람들 초상화




그 과정에서 산업화와 교통의 발달도 함께해 브로츠와프는 행정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도시의 자치도 강화되어 실레지엔 지역의 명실상부한 핵심 지역이 된다. 하지만 당시 정치의 자유는 여전히 프로이센에 억압되었던 상태였고, 브로츠와프의 시민은 프랑스혁명에 힘입어 1848년 3월 6일, 자치권의 확대와 개혁을 요구한다. 그 중간 과정에서 어느 정도 성과도 생기고, 1849년 5월에는 시민들이 도시에 모여들면서 왕이 계엄령을 내릴 정도로 갈등이 격화되지만, 결국 혁명은 실패한다. 그 뒤로도 1851년 왕이 선거에 개입하거나 중앙 권력이 강화되는 등, 정치적 긴장은 계속 유지된다.





Karl von Holtei 전시관. Holtei의 흉상과 초상화, 당시의 피아노 등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다른 쪽에는 카를 폰 홀타이(Karl von Holtei, 1798~1880)라고, 브로츠와프 출신의 명성 높은 시인이자 극작가, 배우였던 인물이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걸작들을 만드는 한편 다양한 도시들을 유랑하는 낭만적인 삶을 산 것 같아 보이지만, 아내를 두 명이나 잃는 비극도 겪었다고. 아쉽게도 투리는 그의 작품을 하나도 모른다.




19세기 중반부터 1930년까지의 인물 초상화들과 브로츠와프의 풍경, 건물들을 찍은 사진 전시관.




휴, 이걸로 1층의 전시관 설명은 위의 초록 전시관을 끝으로 모두 완료! 투리가 찍지 않은 물건들과 자료들도 꽤 많지만, 그걸 감안해도 전시관은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 투리가 안 찍은 대상들 중에는 고급스러운 식탁이나 회화 작품들 등도 많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가셔서 눈으로 확인하시길. 아무튼 다시 0층으로 돌아왔다. 글의 이해를 위해 아래 내용부터는 사진을 시대순으로 올릴 예정이지만, 실제 전시관의 순서는 그에 역행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0층의 마지막 전시관, 19세기와 20세기 전시관부터 살펴보자!







혁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을 구가하던 브로츠와프는 1871년 독일 제국의 성립과 함께 급속적으로 성장해, 20만 명의 인구가 1910년에는 50만 명을 돌파한다. 유대인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동체 중 하나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이룬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브로츠와프의 번영은 완전히 무너진다.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물과 식량의 중요성은 극대화되고, 자치구들은 에너지와 식량을 보호하고 공급받을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다. 이때 브로츠와프의 늘어난 인구는 식량 부족과 낙후된 보건 환경에 의해 큰 타격을 입는다. 어느 정도냐, 독일 제국의 소속 지역에서 가장 많은 결핵 사례가 보고되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 브로츠와프일 정도이다.


위의 사진은 브로츠와프 사람들이 전쟁 당시 착용하거나 이용한 장비들, 그리고 당시의 사진들을 전시한 방을 일부 찍은 것이다. 사진 속 오른쪽 흑백 사진을 보면 여성이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저 당시에는 전시경제 상황이라 거의 모든 산업이 군수 쪽에 집중되었다고. 이에 따라 실직의 문제도 커지고, 결국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황제 윌리엄 2세는 폐위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기가 시작된다. 이후 나치당의 마수가 뻗치기까지, 브로츠와프는 정치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당시 브로츠와프의 가장 큰 회사 'Linke-Hofmann-Werke'가 만든 트램과 철도 전시관




그러는 사이, 1925년에서 1929년 사이에는 'Linke-Hofmann-Werke' 회사에 의해 232개의 트램이 제작된다. 처음에는 그냥 그때 그 시절의 트램인가? 싶었지만, 무려 50년간이나 다른 회사들의 제작에도 참고될 정도로 근본 있는 교통수단이었다고. 미국 동기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해당 트램은, 한동안 브로츠와프 풍경의 일부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 브로츠와프에 돌아다니는 트램들은 저것보다는 세련된 편이다.




브로츠와프의 Royal Technical College의 교수들 초상화




아무튼, 이렇게 상황이 심히 안 좋다 보니 도시는 이 문제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이때 시장의 지원 아래 도시는 발전계획에 돌입한다. 도시는 크기를 43개의 외곽 지역까지 확장하는 한편, 상업지구, 거주지구 등 구역마다 체계적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대학도 발 벗고 나서서 도시의 회복을 도왔다. 당시 'The Royal School of Technology in Wrocław(Königliche Technische Hochschule Breslau)'라고 불렸던 대학의 졸업생들은 1928년 이후 도시의 발전계획에 관여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 대학은 현재의 '브로츠와프 과학기술대학(Wrocław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전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공황과 초인플레이션이 넘치는 시기이기는 했지만, 의외로 이때 스포츠나 음악회 등 문화적인 면에서는 그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몸은 가난해도 여가는 양보할 수 없다는 얘기인가.







아무튼 이렇게 살기 힘들다 보니, 1920년대 말쯤에는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서서히 확산하기 시작한다. "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의 파괴"를 목표로 했던 이 당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당선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곧이어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해 유대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한다. 비아리아인들은 중앙행정에서 점점 밀려나고, 7월에는 급기야 비나치당마저 정계에서 퇴출당한다.


한편 1940년에는 독일의 발덴부르그에 Gross Rosen이라는 수용소가 세워지는데, 이때 나치당의 정적이었던 브로츠와프인들도 다수 해당 수용소에 수감된다. 위 사진을 보면 수용수들이 입은 옷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폴란드계 인물이 많았다고 한다. 다시 사진을 보면, 마름모 모양의 도형 안에 'P'가 적혀 있는 문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폴란드인들의 옷에 해당 마크를 달아 그들을 구별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용소는 확장해서 브로츠와프에서도 위성 캠프가 생길 정도가 되는데, 브로츠와프는 군수공장, 항공 부품 조립 등 다양한 일들이 연계되어 전쟁에 강제적으로 엮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이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희생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렇게 보면 브로츠와프의 독일계 사람들은 안전했냐고 물어볼 수 있는데, 그렇지도 않다. 1944년쯤 되었을 때 소련군의 진격이 빨라지자, 브로츠와프는 요새화되면서 민간인에게 대피 명령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독일 민간인들이 눈보라 속의 추위와 폭격에 노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기아로 인한 사망자도 다수 발생했다. 그리고 도시는 도시대로 요새화되다가 소련군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브로츠와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은 포츠담 회담에 따른 강제이주로 인해 희생당해야 했다. 전쟁의 피해자는 적국과 피해국을 가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강제로 동원되었던 조선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전쟁 시작'이라는 말은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는 걸 느낀다.







다음은 마지막 전시관, 전후 20세기에 관한 방이다. 아마 여러분이 마주하는 전시관으로 따지면 해당 글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전시관이 이곳일 것이다.


이 전시관은 공산주의 체제가 종식되기까지의 자료들를 정리한 곳으로 보인다. 아까도 말했듯 이때 독일인들은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하게 되고, 반대로 다른 곳에서 살 터전을 잃은 폴란드 난민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한다. 도시는 전쟁으로 인해 거의 폐허인 상태이며, 소련의 영향은 아주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브로츠와프는 자체 행정부를 세워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오랜 노력의 결과, 브로츠와프는 이전 몇백 년과는 달리 점차 폴란드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소련의 입김이 강했기에 위성 도시와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듯이, 점차 이 도시에서도 민주주의적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결국 44년 뒤 1989년 브로츠와프는 개방 도시로 완벽히 탈바꿈한다.




전후 폴란드에서 상영한 영화들을 보여주는 스크린




여기까지가 투리가 본 브로츠와프 1000년 역사를 알려준 '브로츠와프 왕궁'의 전부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소개한 전시관의 순서는 투리 본인의 편의에 따라 바꾸었기 때문에 실제 전시관의 순서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투리의 글을 봤다고 박물관이 궁금해져서 실제로 들어갈 사람은 없을 것 같고, 내친김에 브로츠와프의 역사를 같이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싶어서 이번 글에서는 이렇게 글을 이어갔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도시의 현재 거주민들은 대대로 이곳에 산 사람들이 아닌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브로츠와프는 그 이전의 대는 끊긴 것 같으면서도 문화적 전승은 이어지는 묘한 느낌도 든다.




세계 2차 대전 직후 폴란드의 상황을 소개하는 스크린과 스탈린의 흉상




역사적으로 따지면, 폴란드는 거의 600년 만에 브로츠와프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것도 시대가 바뀔 때마다 거주민들도 같이 물갈이되면서. 이쯤 되면 제목에서 '되찾았다'라는 표현을 써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솔직히 말하면 승전국들 사이의 흥정도 많이 작용했다. 그렇지만 그 오랜 옛날, 피아스트 왕조는 이 땅을 장기간 통치하면서 한때 폴란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었다. 그리고 나중에 차차 서술하겠지만, 폴란드 역시-과거 우리 조상이 그랬듯-외세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런 그들에게 '역사적 명분이 강한 대도시'라는 달콤한 보상은, 나름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결과물이 아닐까?



끝내는 폴란드에게 돌아왔지만, 어떤 정체성을 가졌든 강렬한 위세를 뽐냈던 브로츠와프. 이 도시의 진정한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곱씹으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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