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기행] 나치 강점기, 꺼져라!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제국을 향한 폴란드 시민들의 분노의 궐기

by 흑투리




3월 초중순쯤, ESN 단톡방에서 위와 같은 공지가 왔다. 우리 같이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투어를 해보아요!라고. 투리의 교환학생 학교 같은 경우 목요일 오후쯤 위와 같은 ESN 활동들이 많이 뜨는데, 2025년 3월 20일은 '친구끼리 박물관' 타임이었던 것. 바르샤바의 박물관이라면 모든 박물관을 닥치는 대로 방문하려는 야망이 있었던 투리. 가면 친구와 우애도 깊어지고, 박물관도 가고.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는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투리는 밥 먹을 틈도 없이 바로 학교의 림바 기숙사로 직행했다.


사실 이 활동이 아니더라도,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원래 투리가 벼르던 박물관이기는 했다. 폴란드를 좀 아시는 분들! '폴란드'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항상 말하지만 뭐 쇼팽, 레반도프스키, 이런 분들도 있겠지만, 투리에게 폴란드란 유럽의 '저항 정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이란 나치, 소련과 같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향한 저항을 뜻한다. 특히 세계 2차 대전에는 폴란드 시민들이 직접 들고일어나서 나치와 싸운 흔적이 있는데, 그 정신을 위의 박물관에서 확실히 기록했다는 얘기이다.





박물관에 도착하는 와중 파트너 한열이랑 본인 생일 얘기를 주야장천 하다가 실수로 일행을 놓쳤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본인이 일행보다 먼저 와 있었다. 아무튼 4시 반 조금 안 되어서, 우리는 박물관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사물함과 티켓 사진



참고로 위 박물관은 물건 맡기는 사물함이 바깥에 있었다. 이건 폴란드의 박물관을 방문할 때 알아두면 좋은 내용인데, 간혹 저런 사물함들 중에 문 안쪽에 1zt 동전을 넣어야 잠글 수 있는 사물함이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약간의 동전들을 들고 다니는 것을 추천한다. 없다 해도 아마 관리자 분께서 높은 확률로 비슷한 모형을 주실 것이다. 아무튼 티켓까지 발급 완료. 이제 입구로 들어가 보자!





안을 들어가니, 위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시청각 자료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박물관은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 계열의 분위기에 적당한 명도의 불빛들이 안을 비추고 있었다.



폴란드 봉기에 참여했던 인물들 중 하나. 이 분은 다행히도 전후 시기까지 생존하신 분인 것 같다.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이 박물관이 담고 있는 폴란드의 역사에 대해 하나하나 간략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이해를 위한 시대상을 먼저 말하면, 나치가 바르샤바를 점령한 기간은 1939년 9월부터 1945년 1월까지이다. 이 중 봉기가 일어난 기간은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63일간이다. 63일? 이렇게 보면 별로 길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봉기는 유럽 현대사에서도 시민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받을 정도로 그 의미가 크다. 우선 이 봉기는 도시 규모에서 일단 무장봉기 자체로 봐도 규모가 큰 편에 해당되고, 무엇보다 이 싸움에 국내군뿐만 아니라 현지 시민들도 이 싸움에 동참했었다. 특정 귀족이나 지식인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이 봉기의 주체였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로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뒤에 있었던 여러 자료들과 포스터



아까 말했듯 봉기의 기간은 63일이지만, 갑자기 시민들이 분노해서 일어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이 박물관은 "폭풍우 작전(Tempest Operation)"을 가장 첫 번째 전시관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 작전은 폴란드 국내군(아르미아 크라요바, 약칭 AK)이 점령 독일군에 맞서 도시와 지역들을 최대한 장악하는 작전인데, 소련군과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보이는 모습으로 전쟁을 마치는 것이 목표였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에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있었듯, 폴란드도 망명정부가 런던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도 연합국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소련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시관 안 망원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당시의 사진들. 나치가 폴란드를 지배했던 순간의 사진들인 것 같다



폭풍우 작전은 볼히니아 지역에서 1944년 1월, 동쪽 폴란드 영토에 붉은 군대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독일 국방부를 상대로 빌뉴스(지금의 리투아니아 수도), 르비우, 비아위스토크(벨라루스 근처의 폴란드 도시) 등에서 소련 군대와 협력하여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다. 하지만 이들 지역 대다수에서 폴란드군은 소련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추방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빌뉴스 같은 경우는 폴란드와 소련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협상단이 현장에서 체포당한다.



실제로 리비우와 빌뉴스 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했던 인물들.



결국 독일군 격퇴라는 폴란드군의 목표는 성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소련에 의해 강제 징집되거나 감금, 살해당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사실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소련군이 어마어마한 희생 끝에 독일군을 몰아낸 사건이 있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소련은 미래의 폴란드가 맞서야 하는 주요 세력이 된 것이 예견된 게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국내군 총사령관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을 "동맹군"이 아닌 "동맹군의 동맹군"으로 명명하며 본인들이 직접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강력한 명분을 얻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도전을 극복하기에 소련의 외교력과 군사력의 문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나마 잡던 지푸라기였던 서방마저도 전승국들 중 하나인 소련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총사령관은 작전 중 독일군에 잡혀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바르샤바가 점령당했을 때의 실제 역사적 사료들



폴란드가 한동안 공산권 국가로 변한 것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 "루블린 정부"였다. 아까 말했듯, 이 폴란드는 영국에 망명정부가 있었고, 폴란드 지하국가라는 독립적인 기관도 서로 연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은 폴란드 동쪽의 루블린 지역을 거의 장악한 후 "루블린 정부"를 별개로 세운다. 정부의 인원들은 주로 소련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은 요인들이었다. 소련은 6월 21일 폴란드 동쪽의 소도시 헤움(Chełm)에서 폴란드 국민해방위원회(Polski Komitet Wyzwolenia Narodowego, 영어 Polis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의 선언을 선포한 다음, 7월 28일이 되어서야 해당 도시로 가서 직접적인 통치를 시작한다. 당연히 서방 연합국은 저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하튼 루블린 정부는 장악한 지역의 폴란드군을 처형하거나 암살하면서 본인의 세를 확장한다. 좀 이따가 바르샤바 봉기 때 설명하겠지만, 바르샤바가 독일군에게 참패당한 것도 루블린 정부와 소련의 의도적인 방관이 하나의 큰 원인이었다. 한 마디로 소련은 폴란드에 결코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박물관 안에 있는 예배당. 실제로 이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가 진행된다고 한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도 담겨 있는 듯



배경설명이 조금 길었다. 여하튼 폭풍우 작전은 여러 도시로 연계가 되다가 바르샤바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폭풍우 작전이 완전히 결론 나지는 않았지만, 국내군의 형세로 볼 때 바르샤바에서의 봉기가 독립을 인정받을 최후의 기회로 보였다. 게다가 독일군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폴란드 시민의 독립 열망이 하늘을 찌른 것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들은 소련군이 먼저 바르샤바를 해방하기 전에 본인들의 손으로 "직접" 바르샤바를 독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이 바르샤바 봉기이고, 이 봉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저항운동사에 있었던 최대 규모의 단일 군사행동이라고 평가받는다. 단순히 63일 싸움이 아니라는 얘기다.



첫 전시관을 지나고 나서야 도달한 가장 큰 메인 홀(?).



안타깝게도 투리가 웹사이트를 뒤져보니, 바르샤바의 외부 상황이 봉기에 녹록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장시간 진격에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황이었고, 독일군은 바르샤바 요새화를 위하여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이를 몰랐던 바르샤바 봉기군 사령관은 1944년 8월 1일, 오후 5시에 봉기를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초반에 봉기군은 파죽지세로 바르샤바를 점거했다. 이들은 도시 중앙, 구시가지, 볼라 지구 등 바르샤바의 주요 지역들을 장악한다. 그리고 5일에는 독일군의 볼라 공격, 11일에는 구시가지 공격으로부터 방어까지 해낸다.



바르샤바에서 당시 독일군이 사용했던 오토바이



그렇지만 행운은 거기까지였나. 8월 20일과 21일, 조리보시(Żoliborz)의 폴란드군(AK)은 바르샤바의 구시가지 쪽을 지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하나, 바르샤바 대학 등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실패하고 만다. 상황이 안 좋아지자, 구시가지의 군인들은 배관을 통해 조리보시와 중앙 도시를 직접 이동하기로 한다. 한편 소련군은 12마일 떨어진 프라가에서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고 재정비를 시작한다.



얼마나 상황이 열악했으면 배관을 통해서라도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까. 어쨌든 9월 초가 되면서 독일군은 구시가지 등 여러 지역들을 하나하나 재탈환한다. 조금씩 안 좋아지는 상황에, 소련 측의 제1 폴란드군은 9월 15일 밤, 봉기군을 지원하기 위해 비스툴라 강 돌파를 단행한다. 이들이 이동하고 며칠 뒤 군인들이 하나둘 강 왼쪽 유역에 상륙하기 시작하고, 9월 19일에 강 일부 구역을 장악한 그들은 독일군과 맞서 싸운다.



맨 위의 사진에서 폴란드군이 비스툴라 강에서 독일군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외에 폴란드군 지휘관 Berling 쪽 군인들 사진도 있다.



당시의 지휘관은 지그문트 베를링(Zygmunt Berling)으로, 소련 측에 속하긴 했어도 같은 폴란드인이었기에 지나가는 상황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소련은 강 동쪽에 머물면서 대기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베를링이 자체적인 판단으로 강을 건넜던 것이다. 하지만 병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을까. 소련군의 병력과 중장비, 공군 지원을 받지 못한 베를링의 군대는 독일군에 의해 참패하고 만다. 비록 공산군 측이라 마냥 반갑지는 않았겠지만, 그나마 봉기군을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외부 세력이 그렇게 당한 것이다.



바르샤바의 독일군의 의상과 황폐해져 버린 폴란드의 사진



그 사이 봉기군의 환경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바르샤바 안의 시민들은 절망과 굶주림으로 고통받기 시작했고, 스탈린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소련 공군의 지원은 요원했다. 미군은 9월 18일이 되어서야 도착하므로 그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바르샤바 시민들의 열망에도 소련 공군은 공중지원 하나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미군이 서부전선에서 보급품을 들고 소련 공군기지에 착륙하는 것을 불허한다.



당시 시민들이 썼던 수저



이 모든 상황은 봉기군의 비참한 패배를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어선은 점점 좁아지고, 군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6일이 되자, 결국 모코투프 지역에서 대규모 탈출 및 대피 작전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지하 하수도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건 단순한 도보 이동이 아닌, 숨 막히는 어둠, 좁고 물 찬 통로, 그리고 독일군의 수류탄 위협 속에서 진행된 위험한 탈출 시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질식, 체력 고갈 등으로 인해 희생당하고 만다.



실제 사람들이 대피하던 모습을 담아낸 사진. 실제 하수도 안을 재현한 전시공간도 여기 근처에 있다



구시가지에서의 싸움만 보도록 하자. 구시가지 측의 봉기는 이미 8월 14일에 끝을 달리고 있었고, 7천 명의 부상자와 3만 명의 시민들은 해당 지역을 탈출했다. 구시가지를 점령한 독일군은 남아 있는 시민들을 모조리 살육했고, 그 과정에서 야전병원의 환자들은 화형당했다. 이 싸움에서 죽은 폴란드인은 3만 명에 달했고, 봉기군의 사상자는 7천5백 명이었다. 전체 약 77%에 달하는 피해였다고 한다. 독일군 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전체 55%에 달하는 3천9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방송국 기기들과 폴란드 의무병과 병사들 복장.



1944년 10월 2일, 승패는 명확해졌다. 오후 8시를 기해 모든 교전은 중지되었고, 4일에는 봉기군의 신문 연재도 중단되었다. 봉기군은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했으며, 총 1만 5천 명의 봉기군이 포로가 되었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그들이 입은 군복이 기술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폴란드 국기 완장만 떼면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그 완장을 떼는 것을 거부했었다. 그들은 엄연히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포로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왼쪽 사진은 여성 포로들의 사진인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은 누군가의 무덤.



투리 본인도 글을 정리하다 보니, 이 63일의 기간이 한국의 역사와 참 많이 닮았다고 느껴진다. 한국도 일본에 의해 참 많은 피해를 당했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진영이 나뉘는 유사한 시기를 거친다. 물론 자세히 따지면 한국은 아예 분단까지 당한 점에서 다르기는 하다. 다만 투리의 입장에서는 유사하게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



소련 측 폴란드군 사진



해당 글에서 사진 자료를 많이 올리기는 했지만, 투리가 박물관에 있었던 시간은 2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입장 시각이 4시 반쯤 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촉박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 2차 대전 때 바르샤바가 겪은 상처를 직접 생생히 볼 수 있었던 점에서 그 시간은 매우 값졌다고 생각한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지금 투리가 올린 사진들은 박물관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 안을 직접 찾아간다면, 더욱 많은 사례들과 역사적 사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영어를 읽을 실력은 있어야겠지만.



시인 카밀 바친스키. 바르샤바 봉기군들 중 한 명으로, 폴란드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비유하자면 폴란드판 이육사.



글을 마치면서 투리가 하고 싶은 말은, '자유'라는 개념은 거저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얘기했듯, 거의 모든 상황에서 공짜는 없다. 갑자기 무언가 좋은 것을 얻었다면, 충분히 의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올해의 민생지원금을 생각해 보자. 얼핏 보면 돈을 받으니까 좋은 것 같지만, 그만큼 국가장학금과 기초연금에서 많은 금액이 줄었다. 거저 받는 것은 분명히 대가가 있고, 설령 당장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대한민국이나 폴란드나, 그전까지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투리 본인을 비롯한 모든 독자들이 그것을 잃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후배들, 그리고 후대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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