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쿠스 언덕>, 건국자를 기리는 숭고한 봉우리
여행을 하면, 사람들이 새로운 도시를 갈 때마다 꼭 찾는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전망대.
그런데 단순히 전망대라고 광고하면 재미없지 않은가? 전망대는 거의 모든 도시들마다 갖추고 있는 요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면?
"짜잔! 여기에 무시무시한 용을 죽인 한 영웅이자 왕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을 여러분이 특별히 무료로 올라갈 수 있게 해 드립니다! 올라가면 경치도 죽여줘요!"
마물을 잡은 왕의 웅장한 이야기, 무료로 명도시를 전망할 수 있는 위치, 거기다 그 어마어마한 사이즈까지! 광고만 잘하면 도시가 안 유명해도 사람들이 모일 각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이 무덤은 실제로도 크라쿠프의 필수 관광지들 중 한 군데이기도 하다. 그걸 당연히 모를 리 없는 ESN 위원회. 현대미술관 방문을 마친 뒤, 우리는 곧바로 걸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어마무시한(?) 무덤, '크라쿠스 언덕'에 대해 알아보자. 무덤 위를 걷는다고 고인 모독하는 거 아니니까(사실 진짜 무덤이 아니기는 하다), 염려 말고 우리를 따라오시길.
바로 직전에 있던 곳이 크라쿠프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라서, 언덕에 가기까지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도 왜 교통수단을 안 쓰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대개 도보로 도착하는 시간과의 차이가 별로 없다. 1000원, 2000원 써가면서 5분 빨리 도착할 바에야, 차라리 걷는 게 낫다는 말이다. 그동안 많이 걸어서 지치긴 했지만, 해당 일정이 당일 마지막 관광지니 투리도 속으로 조금만 버티자고 외치며 이동했다.
계속 걷다 보니, 동기들은 각자 벌써 친해졌는지 이전보다 활발한 분위기였다. 본인과 같은 방을 쓰는 예술가풍 모자의 남자는 미술관에서 피아노를 친 이네즈와 친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고, 불가리아 삼인방도 다른 여자들끼리 각자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와 카밀리아는 크라쿠프 구시가지 편에서 살짝 소개했는데(2권 8화 '다른 열강들마저 사린 이 도시' 참조), 나머지 한 명은 아직 얘기를 안 했다. 해당 동기는 정식 이름이 카롤리나이지만, 동명이인이 뒤에 언급될 관계로 '키키'라고 부르겠다. 키키를 보면 뭐랄까, 반 학생에 비유하면 외향적이고 활발한 여학생의 전형이다. 그녀는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에게도 말을 잘 거는 스타일이며, 어울리는 사람의 폭도 꽤나 넓은 편이었다. 바르샤바 투어를 처음 했을 때 단체로 팔찌를 돌린 적도 있었다. 거기 있던 투리도 당연히 그걸 받았고, 현재 본인의 자료 아카이브에 추억용으로 들어가 있다. 키키 말에 따르면 불가리아에서 학기 초마다 이런 걸 돌리는 문화가 있다나 뭐라나.
그렇게 다른 동기들은 각자 대화 상대를 잘 찾는 것 같았지만, 너무 T발 놈이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동기들에게 다가갈 명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건다 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에너지를 쓰는 게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혼자 걸었는데, 역시 외로운 기분이 안 들기가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활발한 친구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한 동기가 먼저 본인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알렉세이였다. 크라쿠프에 갈 때부터 말을 조금 걸었던 친구여서 그런지, 서로 자기 학과에 대한 얘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이 친구는 독일인인데, 전공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쪽이었다. 그래서 공학적인 얘기들을 알렉세이 쪽에서 많이 해줬는데, 슬프게도 지금은 그 내용을 다 까먹었다.
본인이 얘기를 전부 알아듣지 못해 알렉세이가 머쓱해할 때쯤, 우리는 어느새 경사가 높은 어딘가에 도착했다. 경사에 주의하면서 조심조심 올라가니, 우리는 어느새 위 사진의 높은 곳에 올라와 있었다.
"앗! 여기가 그 말로만 들었던 크라쿠스 언덕인 건가? 벌써 도착했네?"
머리를 비우고 걷다가 본인도 모르게 도착해 버린 이 언덕. 오르는 게 등산만큼 힘들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삽시간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경치는 충분히 볼만했다.
크라쿠스 언덕은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라서,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언덕 위로 오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돈을 따로 안 내고 전망대에 올랐던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많이 없었다. 더군다나 무려 폴란드의 대표 관광 도시 크라쿠프의 전망대이다. 이런 곳을 지나가지도 않는다면 그만한 손해는 없다.
몇몇 동기들은 잔디 위에 앉아서 아래를 보았고, 몇몇은 그 자리에 서서 도시를 감상했다. 몇몇은 다른 동기들과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동기들 중 대만인 산다라는 사진 찍는 걸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런 포토스폿을 놓칠 그녀가 아니다. 마침 언덕 위에서 전문 카메라 장비를 든 동양 남자들이 두 명 있어서, 그녀는 그들에게 바로 다가가 사진을 부탁했다. 언어가 통하는 걸로 봐서는 최소 중화권 사람들인 것 같았다.
한편 디지털카메라 소유자는 우리 쪽에도 있었다. 바로 아루잔. 그녀는 카메라를 꺼내면서 친구들의 인생샷을 찍어주었다. 이에 키키 등 다른 친구들도 반응을 보였다. 본인도 조용히 언덕을 보고 있었는데, 아루잔이 사진을 찍어주겠다면서 자세를 한 번 잡아보라고 했다. 덕분에 투리도 아루잔의 카메라로부터 수혜를 입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실제로 본인의 사진을 보니, 구도나 화질이 정말로 괜찮았다.
크라쿠스 언덕은 주변 풍경이나 분위기도 도시공원처럼 평화롭고 좋은 분위기였는데, 아까 말했듯 원래는 왕의 거대한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곳(Kopiec Krakusa, 영어로 Krakus Mound)에 잠들어 있는 왕은 크라쿠프 도시를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크라쿠스 왕(Krakus)인데, 기원전 6세기에서 8세기 사이의 왕으로 추정이 된다. 아, 그런데 진짜로 실존했던 왕은 아니고, 전설 속에 언급되는 상징적인 존재에 가깝다. 그 한국도 옛날에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가 있다고 하지 않나. 약간 그런 느낌 아닐까 싶다.
크라쿠스 왕이 활약한 시기는 피아스트 왕조가 생기기 한창 전이지만, 그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자료는 13세기에 지어진 '폴란드 연대기(Chronica Polonorum)'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크라쿠스는 용을 용맹히 퇴치하고 도시를 세운 전설적인 창건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다른 전설에 따르면, 그의 두 아들은 성정이 달랐나 보다. 두 아들의 이름은 각각 크라쿠스(아버지 크라쿠스와 이름이 같다)랑 레흐였는데, 이들은 서로 싸우다가 레흐가 죽고 만다. 크라쿠스는 레흐가 용과 용맹히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고 백성들을 속이고 본인이 왕이 되지만, 결국 진실이 들통나 백성들에게 죽고 만다고 한다. 투리는 어떤 이야기를 정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크라쿠스'라는 이름 자체가 이 도시에 가지는 상징성이 크다는 건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언덕은 왕을 애도하던 시민들이 자신의 소매에 모래와 흙을 담아와 이 장소에 쌓아 고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왕이 생전에 도시를 다스렸듯이, 죽은 뒤에도 이 언덕이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에 이렇게 크게 지은 걸로 알려진 것 같다. 하지만 확인한 결과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유물만 발견되었을 뿐, 사람의 유해나 뼈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언덕이 세워진 진짜 의도는 무엇인가? 어떤 학자들은 이곳이 종교 행사나 천문학적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또 혹자는 기원전 켈트의 유산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적어도 이 글이 업로드된 시점까지는) 확실한 건 없다. 너무 옛날이야기다 보니 밝혀진 게 많지는 않지만, 뭐 어떤가. 원래 이야깃거리는 그 종류가 많을수록 내용이 풍족한 법이다. 그런 전설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이 이 언덕을 재밌게 오르기만 해 준다면, 투리 같은 관광자의 입장에서는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물론 폴란드 역사학자의 입장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각자 맘에 드는 사진까지 찍고 나니, 해가 거의 저물어 갔다. 이제 ESN 동기들은 대부분 언덕 위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언덕의 일정을 마쳤다. 비록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이 경치가 얼마나 좋으면 백성들도 크라쿠스 왕의 무덤 위 경치가 이렇기를 바랐던 걸까. 동기들도 하루의 여정에 만족한 듯, 각자 웃는 얼굴로 옆 동기와 얘기를 나누거나 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투리 본인도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동기들의 모습을 위 사진으로 남겼다. 억지로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의 장면. 이 장면이 투리가 브런치북에 남기고 싶은 장면들이다.
기분 탓인가. 이번 기행글은 다른 글들보다는 꽤 짧은 편인 것 같다. 뭐, 사람들이 앉으면서 쉬다 가는 언덕 리뷰 아닌가. 여러분도 이번 글이 잠시 쉬어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높이 16M, 지름 60M의 큰 봉우리와 아름다운 경치. 이만하면 크고 아름다운 전설 속 왕의 무덤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주변 봉우리들이 도시개발로 인해 사라졌음에도 홀로 고고하게 남은 언덕. 이 언덕은, 여전히 크라쿠프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자랑거리로써 이 도시를 대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