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급 가정부’ 엄마의 42.195km 장거리 (2)

구령 대신 거친 숨소리, 헉 헉 헉 헉!

by 기리달

마음이 요동쳐 문득 달리기 시작한 지 한 달 하고도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친한 동생이 솔깃한 얘기를 꺼냈다. “언니, 우리 마라톤 나가볼래요?” 나처럼 달리기를 좋아하고 몇 년 전에도 같이 마라톤을 나간 적 있던 그녀의 제안에 고민할 것도 없이 단숨에 대답했다. “해보자.”


요즘 거의 매일 달리는 중이었고, 당시 관심사는 오로지 ‘달리기’ 뿐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바로 나만의 무모한 염원, '42.195km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래, 지금 아니면 언제 뛸래?’

당장 신청 가능한 마라톤 일정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기존에 대회를 접수한 사람들이 취소해서 남은 인원을 추가로 뽑는 대회가 남아 있었다. 마라톤에 나보다 더 진심인 동생의 도움을 받아 ‘2024 JTBC 서울마라톤' 풀코스 신청에 성공했다.


대회는 서울의 강북과 강남을 가로지르는 코스로, 상암 월드컵 공원에서 시작해 종로를 지나 올림픽 공원까지 달리는 것이었다. 대회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하고도 일주일에 불과했고, 유난히 무더웠던 늦여름과 초가을 아침을 달리기로 시작했다.

시작은 기세등등했지만 날이 가까워질수록 '달린 지 3개월 된 하수가 풀코스를 뛰어도 되는 건가?'라는 불안함과, '남동생이 입대를 앞두고 이런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회를 앞두고 필요한 물품들이 배송되었고, 그 안에는 경기운영을 위해 숙지할 안내서가 담겨있었다.


안내서를 정독하던 중 눈에 확 띄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돌연사’. ‘마라톤 돌연사를 피하려면 평소보다 과도하게 달리면 위험하니 자신의 몸 상태를 잘 판단하라’라는 내용이었다. 글귀에 마음이 철렁했지만 원래 도전은 무모해야 제맛이고,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라는 심정으로 내 나름의 작고 무딘 칼날을 다듬어갔다.


드디어 결전의 날,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지만 어서 출발해야 했다. 달리기 세 시간 전에는 먹어둬야 한다는 탄수화물도 야무지게 먹고, 대회 때 필요한 배 번호표, 에너지 젤 등을 챙겼다. 대회장이 가까워져 올수록 전철 안은 마라톤 동지들로 가득했고, 이들과 같은 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고 흥분되었다. 곧 코앞에 펼쳐질 가시밭길은 생각도 못 하고 말이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같은 뜻을 가진 수만 명의 사람과 거리를 통제하고 도로 위를 달리는 그 희열이 나의 엔진을 가열시켰다. 하지만 연습했던 거리인 10km가 넘어가니 두 다리가 벌써 알아채고 무거워졌다. ‘앞으로 남은 32km는 어떻게 뛰지? 아니, 그 거리는 아예 뛰어본 적도 없잖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생각하며 그냥 뛰었다.


힘들 때마다 물을 마시고 에너지 젤을 보충하며 다리를 위로했다. 경기 중반을 넘어서자 아픈 부위가 이내 온몸에 번져갔다. 목, 어깨, 팔, 허리, 허벅지, 종아리, 발목…… 속으로 삼키던 숨이 거칠어졌고, 호흡 때문에 입은 바싹 말라갔다.

어느덧 30km가 지나자 내 모습은 ‘사람’이 아닌 ‘좀비’에 가까웠다. 엄청난 갈증에 물만 보면 달려들어 받아먹었고, 모양새는 뛰고 있지만 속도는 걷는 것보다 느렸다. 36km. 이제 포기하기도 아쉬운 지점, 완전히 너덜나 버려 내 다리인지, 네 다리인지 모를 정도로 무감각해진 몸을 끌고 마지막을 향해 나아갔다.

시선 끝에는 보이는 ‘FINISH’ 글자와 열렬해진 시민들의 응원 소리 덕분에 결승선이 100m도 남지 않은 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지막은 뛰어서 들어오고 싶었는지 다시 달렸고, 그렇게 완주했다.

‘아, 살았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게 완주한 감격의 눈물인지, 아니면 눈까지 차오른 고통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기록은 5시간 2분 11초. 중간에 화장실만 안 갔으면 5시간 이내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소식을 기다릴 가족들에게 결과를 전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포기하지 않고 뛰어낸 나를 마음으로 조용히 끌어안았다. 혹사시킨 몸을 뜨끈한 물로 씻겨주고, 울렁대는 위장을 비싼 초밥으로 달래며 다시는 인생에 이런 극기훈련은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망각의 동물이 맞나 보다. 고통의 후폭풍이 잠잠해지니 마라톤을 향한 짝사랑은 그새를 못 참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도 또 뛸 만한 대회가 없을까’하며 휴대전화 속 화면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굴려본다. ‘그래. 지금 아니면 언제 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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