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캐니언에서 # 일상대여 2
그랜드 캐니언에서
지구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Global Footprint Network)에서는 매년 각 나라가 소비하는 생태자원의 양이 지구가 재생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는 ‘생태 용량 초과의 날’을 발표한다. 한국이 지구 생태자원을 다 소진한 날은 2023년 4월 2일이다. 한국보다 먼저 생태자원을 소진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카타르, 룩셈부르크, 캐나다, 아랍 에미리트, 미국, 호주,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등 9개국에 불과하다. 즉 지구인이 미국이나 한국인처럼 생태 용량을 초과하고 산다면 우리 지구는 4개나 더 필요하다는 소리다. 국립공원을 더 많이 지정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생태계 파괴를 막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게 한다.
11박 12일의 미국 서부 여행길에 올랐다. 거대하고 웅장한 국립공원 그랜드 캐니언을 비롯해 미국의 5대 캐니언을 둘러보고 싶었다. 미국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1시간 이상 걸리는 먼 나라이다. 시차도 우리나라와 16시간이나 차이가 난다. 낮과 밤이 서로 바뀌니 날짜와 요일이 헷갈렸다. 우리는 6월 6일에 미국으로 출발해 같은 달 18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6월 6일 오후 2시쯤 인천공항에서 출발했는데 11시간 이상 걸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니 또다시 6월 6일 아침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 하루를 더 사는 기분이었다. 과거로의 여행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번 여행은 딸의 부부와 우리 부부, 그리고 언니와 함께 갔다. 1년 전부터 여행을 계획했는데 딸이 대부분의 세부 일정을 계획했고, 우리는 듬성듬성 의견을 첨삭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자유여행을 계획하다 보니 소소하게 챙길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총을 소지하는 미국이니 안전이 가장 걱정되었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거리의 노숙자들 때문에 가게에 안전요원을 배치하는 모습을 보았고, 호텔에서도 방 열쇠가 없으면 엘리베이터도 못 타는 것을 경험했다. 샌프란시스코의 6월 중순 저녁은 아직도 쌀쌀했는데 그럼에도 거리의 노숙자들은 비틀거리며 마약에 취한 듯 도로를 점령했다. 행복의 샌프란시스코가 우울의 도시인 듯 마음이 아팠다. 집값이 비싸고 노숙자들이 많아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듯 가로등에 매달린 꽃들마저 그저 화사한 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며 기업들의 콘퍼런스가 열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의 입국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타운에 숙소를 정했다. 그 후 할리우드 거리와 산타모니카 해변을 거닐며 여행의 낭만에 젖어들었다. 그린피스천문대에서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기도 하였고 ‘라라랜드’의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백색의 건물인 게티 센터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를 감상하거나 마네와 모네의 작품을 감상했다. LA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언덕 위의 게티 센터를 지은 장 폴 게티의 업적에 감탄사를 자아냈다. 오감 만족이라는 주제로 꾸며져 있는 게티 정원을 산책하며 여기가 캘리포니아구나라며 여행의 여유를 즐겼다. 그 후 우리는 몇 개의 캐니언을 더 둘러본 후 그랜드 캐니언으로 길을 잡았다.
그랜드 캐니언은 미국 남서부 지역에 있는 애리조나주 북부 지역에 있다. 이곳은 콜로라도고원(Colorado Plateau)으로 불리는 높은 고원지대인데 이곳을 가로질러 흐르는 콜로라도강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대한 협곡이 바로 그랜드 캐니언이다. 협곡의 폭은 180m부터 30k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가 있다. 계곡의 깊이는 1.6km에 이르며 길이는 무려 446km나 된다.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라고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입구에서 입장권을 제시했을 때 모자를 쓴 중년의 안내소 직원은 노련해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한국말로 된 지도를 주며 말을 건넸는데 “그랜드 캐니언은 마음껏 가도 되지만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뜻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랜드 캐니언은 상상 이상으로 볼 것이 많아 쉽게 길을 잃어버린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잊은 채 그 장엄함에 이끌려 가게 되는데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돌아갈 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리 알아본 관람 포인트를 찾아 그랜드 캐니언의 웅장한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H가 트래킹 코스를 따라 협곡 아래로 내려가 보자고 했다. 우리는 마더 포인트의 협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난간대도 없고 밧줄도 없는 협곡이었다. 꼬불꼬불한 협곡을 얼마쯤 내려갔을까? 덥기도 하고 다리도 아파왔다. 위로 보아도 아찔하고 아래를 보아도 아찔했다. 국립공원 측은 그랜드 캐니언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손잡이 하나 없었다. 최소한의 주차장, 최소한의 화장실만 만들어 놓고 그랜드 캐니언을 지킨다고 하니 길에 쇠를 박는 안전장치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인간과 공존하는 것을 아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불편함에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캐니언의 나이 25억 년 중에서 5억 년쯤이라도 내려갔을까? 우리는 이제 거꾸로 솟은 산을 되돌아 위로 솟은 산으로 길을 잡았다. 내려갔을 때보다 올라오는 길은 두 배나 더 힘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랜드 캐니언의 탐험은 양쪽으로 솟은 산을 탐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래로도 산이요 위로도 산이다. 그렇게 오르막길을 따라 현재로 돌아왔다. 별을 탐사하기 전 그랜드 캐니언의 지질을 꼭 연구하고 간다는 지질학자의 말이 떠 올리며 지구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를 쫓아 다음 여행지인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