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닮은 후두 # 일상 대여 2
인간을 닮은 후두
이번 여행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캐니언은 단연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자연만이 할 수 있는 걸작품이다. 자연의 위대함이 어디까지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단연 브라이스 캐니언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랜드 캐니언, 요세미티 국립공원, 자이언 캐니언, 홀스슈 밴드, 엔텔로프 캐니언, 모뉴멘트 캐니언 등 미국의 5대 캐니언과 국립공원 중에서 나는 브라이스 캐니언을 가장 사랑한다. 그랜드 캐니언과 자이언 캐니언이 웅장하고 남성적인 반면 브라이스 캐니언은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캐니언들 마다 특징이 있고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하는 절경들이지만 나는 브라이스 케니언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탄성이 나왔다. 숲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만난 브라이언 캐니언은 숲 속에 숨겨놓은 보물 같았다.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요새 같은 절경에 이끌려 하마터면 뛰어내릴뻔했다. 마법의 성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본 것보다 더 큰 감동이 전해왔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미국 유타주 남부에 있는 국립공원이다. 바다 밑에서 토사가 쌓여 형성된 암석이 우뚝 솟은 후 빗줄기와 흐르는 물에 의해 다시 본래의 토사로 변하여 흘러 내려가는데 단단한 암석만 침식되지 않고 남아서 무수한 첨탑이 생긴 것이다. 즉 물에 의해 침식된 형상이다. 수많은 첨탑으로 이루어진 반월형의 극장 형태를 한 브라이스 캐니언은 동화 속 궁전을 연상케 한다. 보는 방향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의 모습을 한 후두도 있고, 토르의 망치도 있다. 손을 모은 수많은 신들이 기도하는 형상도 보이고, 갓바위 부처 같은 형상도 더러 보인다. 일행 중 H는 온갖 후두의 모양을 우리나라 절경과 접목시키며 여러 가지 형태를 찾아내었다. 황홀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후두의 형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빛과 날씨에 따라 또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해발 7천 피트 내외의 이 공원 바닥에는 ‘시퍼’라고 하는 향나무가 있고, 정상과 전망대 주변에는 전나무,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고 한다. 후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 같은 붉은 흙에서 자그마한 꽃을 발견했다. 후두 사이에서 핑크빛 꽃을 발견했는데 후두의 색과 어울려 또 다른 주인공이 된다. 후두를 따라 아래로 좀 더 내려가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협곡이다. 바닥까지 따라 내려가 보고 싶었으나 너무 먼 거리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그 모습 또한 색다르다. 후두와 후두 사이에 비치는 하늘은 푸르름이 넘치고 그사이를 들여다보는 내 얼굴에도 붉은빛이 돈다.
브라이스 캐니언의 후두는 50년 간격으로 약 1피트씩 후퇴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뾰족탑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 지질학적으로 이미 빠른 속도로 침식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의 모습 이곳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후두가 인간처럼 늙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슬프다. 자연의 손에 빚어졌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라. 어쩌면 우리에게 자연에 순응함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햇빛에 반사된 후두의 얼굴을 내 마음에 담는다.
우리는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 내에 있는 롯지(lodge)에서 하루를 묵었다. 짐을 풀고 잠시 산책길에 나섰는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사슴 한 마리를 마주쳤다. 이곳의 동물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사람을 보아도 도망가지 않는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서로를 믿으면 공존은 쉬워 보인다. 그것을 자연은 알고 있다. 산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현지식을 맛보기 위해 피자와 커피도 주문했다. 때마침 비가 한줄기 내렸다. 미국에서 처음 맞는 비다. 별다를 것 없는 비에도 감흥이 솟는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피자 한 조각을 입 안에 넣는다. 새로운 맛과 새로운 분위기가 여행의 흥을 더한다. 그렇게 나는 후두처럼 내 삶의 하루를 후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