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거지와 구두 공주

성냥 던지는 소녀 - 01화

by rainon 김승진

한여름 아스팔트가 토하는 열기는 역했다. 소녀의 마음은 바빠졌다. 교대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뛰다시피 걷느라 바쁜 낡은 운동화 위로 땀방울들이 투두둑 떨어졌다. 하필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서 멈춰 있었다. 계단으로 걸어 오르는 것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빠를지 소녀의 머리가 바빠졌다. 어느 쪽이든 늦는 건 마찬가지. 숨찬 가슴을 억누르며 소녀는 계단으로 달렸다.


낮술로 인사불성이 된 아빠의 술주정만 아니었어도 지각은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구차한 변명 몇 마디보다는 군소리 안 붙인 ‘죄송합니다.’ 한 마디가 백배 더 낫다는 것을 소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점장도 지각을 두고는 절대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 규정대로 지각한 분초만큼 정확히 급여를 깎을 뿐이었다. 바늘로 찌르면 얼음 조각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딱딱한 얼굴로 점장은 딱딱하게 말했다. “1분 27초 지각. 빨리 옷 갈아입어.”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주말은 피크 시간이 따로 없다. 오후 2시가 넘었는데도 대기 번호표를 손에 쥔 손님들이 아직 4팀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유니폼을 챙겨 입고는 풀어진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소녀의 뒤통수로 매니저가 재촉한다. “A-8번 주문받아.”


남자 둘, 여자 둘, 언뜻 보아도 비싸게 차려입은 두 커플이 메뉴를 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다소곳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던 소녀에게 회색 블라우스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그 순간 소녀의 머릿속을 뭔가가 지나갔다. 푸르스름한 빛의 줄기가 눈앞에 어른거리다가 머리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이상한 기분은 2초 정도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 바람에 소녀는 주문을 놓치고 말았다. “네?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만...” 회색 블라우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금 전에 소녀의 정신을 잠깐 뒤흔든 그것과 닮은 서늘한 냉기가 회색 블라우스의 눈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회색 블라우스가 짜증스럽게 주문을 되풀이하는 바로 그때, 또다시 똑같은 푸른 빛줄기가 소녀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젠장. 망했다. 어쩌지?’ 소녀의 낭패감보다 반 박자 빠르게 회색 블라우스의 히스테리가 시작되었다.


“너 귀머거리야? 지금 장난쳐? 씨팔! 날도 더운데, 어디 별 거지 같은 년이 말귀를 못 들어 처먹는 거야? 안 들어 처먹는 거야? 야! 점장 오라 해!”


14살 이후로 여기저기 별별 아르바이트를 전전해 온 소녀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정이 들 지경인 멘트들이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쉬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냥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화가 난 손님의 진상 갑질을 진정시키는 것, 정답은 그를 더욱 갑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회색 블라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녀의 코앞에다 짙은 루비 색 매니큐어 손톱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싸구려 쌍욕과 그녀의 삿대질에서 풍기는 고급 향수의 향이 뒤엉켜 묘한 화음을 자아낼 때, 낡아빠진 걸레짝 같은 자신의 운동화에 떨궈졌던 소녀의 시선은 회색 블라우스의 검은 구두코로 향했다. 땀에 절어 냄새나는 더러운 운동화를 비웃는 검은 구두 브랜드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명품이라는 건 문외한인 소녀가 봐도 분명했다.


‘더럽고 낡은 운동화와 검은 명품 구두가 마주 보는 모습이라... 사진이라도 찍어둘까? 구두 참 예쁘네.’ 소녀의 머릿속은 엉뚱한 생각에 물들어갔다. 이럴 때는 진짜 귀머거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으니까. 명품 구두의 쌍욕이 4절을 시작할 즈음에, 매니저가 A-8번 테이블에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 직원이 일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불편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서 저희가 서비스로...”


카운터로 돌아온 매니저는 소녀를 측은한 듯 잠깐 보다가 한숨을 길게 던졌다. “점장님이 잠깐 나간 사이라서 다행이기는 한데... 서비스로 내보낸 메뉴 값은 네 월급에서 깔 수밖에 없어. 이건 뭐 나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알지? 한 10분만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잘하다가 오늘따라 왜 그러냐?”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모퉁이를 두 번 꺾어 돌면 흡연구역을 겸한 테라스가 있다. 장마가 잠시 쉬어가는 7월 중순의 공기에서는 기분 나쁜 비린내가 났다. 그 비린내보다 더 기분 나쁜 담배 냄새가 찌든 의자에 털썩 앉은 소녀는 문득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구석 의자에 앉아 길게 담배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눈, 그저께부터인가 출근한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이다.


지하철 안이든, 길거리 어디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정말이지 별 특징도 없어서 평범함 그 자체가 돋보인다 싶은 남자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뭐지? 다 보고 있었나?’ 통성명도 하지 않은 남자가 던진 말에 소녀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해 주기로 했다. “괜찮지는 않지만, 괜찮아야죠. 뭐 제가 실수한 거니까.”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그게 그렇게 씨팔 좆팔 쌍욕 들을 잘못인가? 화나지 않아요?” 소녀가 픽 웃었다. ‘너 알바 처음 하는구나?’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욕 좀 들었다고 그때마다 화가 나면 이 일 못해요. 아니, 세상에 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지...” 이번에는 남자가 픽 웃었다. “보기보단 멘탈이 강하시네. 그럼 뭐 다행이고...” 소녀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짜식이... 지금 비웃는 거야? 뭐야?’ 하지만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는 비벼 끈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툭 던지고 일어나 가게로 들어가 버렸다.


카운터로 돌아와 바삐 주문을 받고 쟁반과 접시를 몇 번 나르고 나니, 회색 블라우스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주치지 말자.’ 소녀는 테이블 정리를 도와주러 가는 척 B 구역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회색 블라우스의 뒤통수를 잠깐 노려보는 소녀의 눈에 좀 전의 담배남 알바생이 뒤따라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 딱 봐도 일부러 뒤쫓아 가는 것이 분명했다. 궁금함을 못 참고 소녀도 가게를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 담배남 알바생이 회색 블라우스에게 아주 공손하게, 그러나 제법 근엄하게 말하고 있었다.


“다 찍어놨어요. 유튜브 스타 되고 싶으세요? 9시 뉴스에 나오고 싶으세요?”


(성냥 던지는 소녀 - 02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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