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소녀의 운동화는 반지하 연립주택에 다다랐다. 그리고...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 속으로 아빠의 고함인지 비명인지가 뛰쳐나왔다. 소녀는 반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황급히 뛰어 내려갔다.
현관 앞에는 연립주택 3층에 사는 주인 여자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보지 않아도 대충 집 안 풍경을 소녀는 그릴 수 있었다. 주인 여자가 이제 무슨 말을 할지도, 소녀는 토씨 하나까지 외울 수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응? 아가씨 착하고 성실한 것 하나 보고 내가 참 많이도 참고 있어. 근데 정도껏 해야지! 사흘에 한 번이야! 사흘을 그냥 못 넘겨! 응? 따닥따닥 좁은 집구석들 붙어 있고, 여름이라 다 창문 열어놓고 사는데, 이렇게 오밤중에 꽥꽥 술주정 해대고 오늘은 유리창까지 깨고! 이사 가겠다고 보증금 빼 달라고 난리야 다들!”
오늘은 제대로 ‘죄송 day’ 구나...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합니다.’만 되풀이하는 소녀의 낡고 더러운 운동화 위로, 툭툭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낮에 또래로 보이는 검사님 따님 공주님한테 수모를 당할 때도 한 방울 나지 않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솟구쳤다. 절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 약해 보이면 그 순간 끝장이라는 것. 눈물이란 건 참고 또 참았다가 아무도 없는 데서 토해야 한다는 것. 소녀의 나름 신조가 오늘은 무너지고 있었다. 혹여 주인 여자가 눈물을 알아챌까,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꾸역꾸역 눈물을 속으로 소리 안 나게 삼켰다.
구시렁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주인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소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반지하 거실 창문 앞, 깨진 유리창 조각들 옆으로 빈 소주병 4개가 뒹굴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뼈밖에 안 남은 알코올 중독자가 그새 잠들어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아빠 손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소녀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아빠 손에 약 바르고 붕대 감는 걸 구구단보다 먼저 배운 소녀였다.
깨진 유리 조각을 대강 치우고 나서, 쓰러져 코를 고는 아빠의 머리에 베개를 가져다 받치고 앙상한 몸뚱이에 이불을 덮어준 소녀는 반은 깨지고 반 밖에 남지 않은 반지하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시작될 장맛비를 품에 안은 먹구름 틈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달빛은 이내 반지하 거실 창문 안으로 손을 뻗쳐 소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 조각을 어루만졌다. “엄마...” 참고 참았던 눈물들이 쏟아지는 가끔 아주 가끔의 밤이면 어김없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여자가 생각나는 소녀였다.
소녀는 창가로 다가갔다. 깨지다 남은 유리창 여기저기, 아빠 손에서 튀겼을 핏방울이 추상화로 남아 있었다. 그 모양이 흡사, 빨대로 붉은 물감을 불어 놓은 것이랑 퍽이나 닮았다. 소녀가 아주 어렸을 때, 도화지에 물감을 흘리고 빨대로 바람을 불어 그림 그리는 것을 가르쳐주던 사람. 미우면서도 그리운 사람. 주정뱅이 남편의 손찌검을 견디다 못해 도망 가버린 사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 어딘가 세상 구석에서 목숨 부지하고 있다면 그녀도 지금 저 먹구름 사이 달빛을 혹시 보고 있으려나.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긴 한 밤. 세면대에서 눈물을 씻어낸 소녀는 아침 편의점 출근을 위해 서둘러 잠을 청했다. 그 시각, 여느 날보다 훨씬 많이 소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낡고 더러운 운동화도 고단한 하루를 접고 쉬기 시작했다.
담배남 한돌의 동영상 촬영은 빈 공갈이었으나, 먹구름은 빈 공갈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세차게 굵어진 아침. 소녀는 아직 자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가난한 1인분 아침 밥상을 차려두고 집을 나서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유통기한의 선을 살짝 넘은 폐기 삼각 김밥과 햄버거들로 아침을 때울 수 있다는 점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고마운 한 가지였다. 레스토랑 일보다 편의점 근무가 소녀에게 고마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익숙하다는 점. 고1 때부터 시작한 편의점 일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없는 출근시간 피크타임이 지나고, 그나마 좀 마음 편하게 화장실에라도 다녀올 수 있는 오전 10시가 좀 넘은 무렵. 소녀는 가방에서 때 묻은 영어 문법책을 꺼냈다. 스물셋. 아직 소녀는 대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아니었지만, 이렇게 틈틈이 책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녀는 감사했다. 어제 잠을 설친 탓인가,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녀의 눈꺼풀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을 쫓으려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무는 바로 그때, 입구 출입문에 매달린 종이 쨍그랑,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얼굴보다 냄새가 먼저 다가왔다. 높은 빌딩들 즐비한 이 동네 그 어디에도 그를 위한 공간은 단 한 뼘도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행색의 등 굽은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카운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로 온 몸을 감싼 할아버지의 모습은 ‘초라하다’는 표현을 몇 차원 초월한 지경이었다. 힘겹게 걸어오는 할아버지 뒤로 출입문 종이 또 쨍그랑. 이번엔 편의점 주인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요. 배가 너무 고파요.” 알아듣기 힘든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듯 목구멍에서 간신히 끄집어내는 할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코를 쥐어 막아야 할 악취였지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참았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보다도 그 냄새에 고개를 돌리는 시선이 할아버지한테는 더 괴로울 거라는 것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소녀는 소시지와 샌드위치를 집어와 자신의 카드로 결제한 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부축해 창가 의자에 앉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할아버지. 금방 드릴게요.”
어이없다는 표정의 주인 뒤로 또 쨍그랑 종을 울리며 젊은 여자 둘이 들어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동하는 할아버지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며 나가버렸다. 오던 손님 발길이 돌아서는 것을 본 편의점 주인은 더는 참기 어려웠다. “야! 여기가 무슨 무료급식소냐? 빨리 안 쫓아내?” “사장님. 이 분 배가 너무 고프다고... 얼른 샌드위치만 드시고 가실 거예요. 계산은 제가 했어요.” “지금 계산이 문제냐고? 당장 내보내!” 소녀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분도 손님이잖아요. 사장님! 식사만 하시게 하고 보내드릴게요!”
대답 대신 카운터로 쿵쿵 걸어간 사장은 소녀의 낡은 배낭을 들어 소녀를 향해 던졌다. “당장 나가! 너 이제 나오지 마! 월급은 정산해서 통장에 넣을 테니까 당장 저 거지새끼랑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