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앞. 담배남 알바생이 회색 블라우스에게 아주 공손하게, 그러나 제법 근엄하게 말하고 있었다. “다 찍어놨어요. 유튜브 스타 되고 싶으세요? 9시 뉴스에 나오고 싶으세요?”
어안이 벙벙,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서 소녀는 눈앞의 상황 전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황과 분노, 두 감정을 섞어서 얼굴에 칠한다면, 아마 저 넷의 지금 표정이지 않을까?라고, 왠지 살짝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소녀는 생각했다. 말문이 막혀 담배남을 노려보는 4명 남녀의 잠시 침묵을 깨고, 회색 블라우스가 악다구니를 퍼붓기 시작했다. “햐... 이런 미친 또라이들. 야! 이 새끼야! 점장 데려와! 이 가게 통째로 날려 줄 테니까!” 회색 블라우스의 욕지거리를 가로막은 것은 그녀의 남자 친구였다. 넷 중에서 그나마 생긴 것이나 옷차림이나 제일 단정해 보이는 무테안경의 목소리는 성우 뺨치게 매력적인 중저음 톤이었다.
“희진아, 그냥 사과해. 더 크게 일 만들지 말자.” 진상녀가 애인을 쏘아보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진상 갑질녀의 애인은 그녀의 말은 무시하고 담배남을 똑바로 째려보며 말했다. “욕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대신에 너도 동영상 얌전히 지워. 이걸로 정리하자.” 역시나 공손하면서도 근엄하게 담배남이 받아쳤다. “사과는 당사자한테 하셔야죠. 성소녀 씨! 이리 나와 봐요!”
‘젠장. 저놈은 또 날 언제 본거야? 에잇.’ 주춤주춤 소녀는 기둥 옆으로 슬며시 나타났다. 얼굴이 확 다시 달아올랐다. 좀 전, 메뉴 주문을 알아듣지 못해 쌍욕 세례를 맞을 때보다도 왠지 더 창피했다.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오늘 운동화를 대체 몇 번을 쳐다보는 건지...
사과할 생각이 없는 회색 블라우스의 어깨를 중저음 무테안경이 툭 쳤다. 신경질적으로 남자 친구를 한 번 흘겨보고 나서 진상 갑질녀는 국어책 읽듯 건조하게 마지못한 한 마디를 소녀에게 툭 뱉었다. “욕해서 미안해.” 그리고 굳이 한 마디 더. “근데 잘못은 말귀 못 알아먹은 니가 먼저야!”
네 남녀가 올라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직전, 중저음 무테가 담배남을 다시 한번 노려보며 내뱉었다. “분명히 사과했어. 동영상 뿌릴 생각, 하지도 마라. 경고했다. 분명히.”
밤 9시, 레스토랑. 마무리 청소와 뒷정리를 전담하는 직원들과 교대한 후, 소녀와 담배남은 가게를 나섰다. 다시 비가 오려는지, 밤공기 습도는 낮보다 훨씬 높아져 있었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훅! 아스팔트 향을 머금은 뜨거운 바람이 얼굴로 덤볐다. “술 한 잔 할래요?” 담배남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냐. 넌? 나 아직 네 이름도 모른다. 어디서 처음 본 날부터 수작이야?’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소녀가 답했다. “그러죠. 뭐.” 딱히 담배남한테 호감이 가거나, 아까 회색 블라우스한테 엿을 먹여준 것이 그렇게까지 고마워서는 아니었다. 소녀도 이런 날에는 술이 당겼다. 술을 잘 못하지만, 적당한 취기가 주는 도피감과 해방감의 맛을 소녀도 알고 있었다.
뭘 먹을 거냐고 한마디 묻지도 않고 담배남은 빌딩들 숲을 지난 시장 골목 안쪽 허름한 순댓국집으로 성큼 들어갔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모! 여기 순댓국 2그릇에 소주 1병이요!” 밝은 목소리를 던지는 담배남은 이 집 단골로 보였다. 텅 빈 가게 구석에서 트로트 경연 재방송을 보며 마냥 홀로 즐겁던 주인아줌마는 손님이 왔다는 반가움보다 TV를 보다 말게 된 아쉬움이 더 커 보였다. “넌 머리 고기나 수육은 못 먹냐?” 퉁명스러운 핀잔을 뱉으며 아줌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배추김치, 깍두기, 새우젓, 생양파 몇 조각에 된장과 함께 녹색 소주병과 잔 2개가 둘 앞에 놓였다. 담배남이 따라주는 한 잔을 받아 내려놓으며 소녀가 물었다.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대기실 사물함에 이름 쓰여 있더만. 이름이 특이하지만 예쁘네요. 성소녀...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그 소녀인가요? 한자가?” 대답 대신 끄덕이는 소녀를 향해 담배남이 말했다. “예쁘기는 한데, 지금처럼 아직 젊을 때까지는 괜찮은데, 나중에 할머니 되면 경로당에서 놀림감 되지 않을까?”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왜?” “할머니 안 될 거니까. 난.” “무슨...?”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 적당할 때 그냥 없어지고 싶어요.”
담배남은 이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돌이라고 해요. 한돌.” “풉” “왜요?” “그쪽은 어렸을 때 놀림 많이 받았을 거 같은데요?” 씩 웃으며 담배남은 잔을 들었다. 식도를 타고 빈속으로 흐르는 알코올의 알싸함은 확실히 마음의 긴장을 살짝 풀리게 하는 힘이 있다. 술 한 잔 생각도 나긴 했지만, 사실 소녀가 한돌이라는 이름의 이 담배남을 순순히 따라온 건 이것저것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까 걔들한테 그렇게 협박한 거. 겁나지 않았어요? 돈 많은 애들 같던데, 무슨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고.” 돌은 소주잔을 채우며 피식 웃었다. “겁날 게 뭐 있어요? 잃을 게 많은 건 그놈들이지. 가진 게 많으면 잃을까 겁나는 것도 많거든.” “그래도 걔들이 배 째라. 동영상 뿌릴 테면 뿌려봐라. 이랬을 수도 있잖아요. 오히려 허락 없이 무단으로 촬영한 걸 문제 삼을 수도 있었고.” “그럴 수 있는 애들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그런 거지. 아까 출근하면서 그 네 명이랑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게에 올라가고 있었어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지들끼리 떠들면서 어떤 놈들인지 다 알려 주더만. 법조인 귀족들 자제분들이었어. 그 입에 걸레 문 여자애는 아버지가 부장검사고, 그 안경 끼고 목소리 깐 녀석은 부장판사 아들이고, 나머지 둘도 뭐 언론사 간부들이 부모라나. 영상 퍼지면 골치 아파지는 귀한 분들이더라구. 그러니까 내 블러핑에 꼬리를 내린 거지.” “블러핑? 공갈이었다고요?” 두 번째 소주잔을 부딪치며 소녀가 깜짝 놀랐다. “응. 그냥 한 소리였어요. 찍긴 뭘 찍어? 애초부터 동영상 따위는 있지도 않았어... 밥 왔다. 먹읍시다. 여기 맛 괜찮아요.” 숟가락을 들다 말고 소녀는 돌의 눈을 잠깐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각자 순댓국 1그릇과 소주 1병씩을 비우고서 둘은 식당을 나와서 헤어졌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소녀는 아까 대답을 하지 못했던 돌의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근데, 아까 왜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 거죠? 그 여자 발음이 안 좋았나? 목소리가 작았나?” 까맣게 잊고 있던 그 푸르스름한 빛이 생생히 기억났다. 그래! 그 이상한 푸른빛 때문이었어. 뭐였지? 하필 그때... 그게 뭐였을까? 눈앞에서 반짝 빛나다가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왔다가 도로 사라진 그 푸른빛 덩어리를 줄곧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소녀의 운동화는 반지하 연립주택에 다다랐다. 그리고...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 속으로 아빠의 고함인지 비명인지가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