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04화
“야! 여기가 무슨 무료급식소냐? 빨리 안 쫓아내?” “사장님. 이 분 배가 너무 고프다고... 얼른 샌드위치만 드시고 가실 거예요. 계산은 제가 했어요.” “지금 계산이 문제냐고? 당장 내보내!” 소녀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분도 손님이잖아요. 사장님! 식사만 하시게 하고 보내드릴게요!”
대답 대신 카운터로 쿵쿵 걸어간 사장은 소녀의 낡은 배낭을 들어 소녀를 향해 던졌다. “당장 나가! 너 이제 나오지 마! 월급은 정산해서 통장에 넣을 테니까 당장 저 거지새끼랑 꺼져!”
‘거지새끼...’ 소녀의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어제였다. 어제 오후 2시 5분이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그와 함께, 회색 블라우스의 메뉴 주문을 못 알아들었던 그 순간의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똑같은 모습으로 소녀의 머릿속에 뛰어 들어왔다. 회색 블라우스의 앙칼진 목소리가 또렷이 귓가에 재생되고 있었다. “어디 별 거지 같은 년이 말귀를 못 들어 처먹는 거야? 안 들어 처먹는 거야?” 거지 같은 년, 거지새끼, 거지 같은 년, 거지새끼, 거지, 거지, 거지...
“사과하세요!” “뭐?” “사과해! 지금! 할아버지한테 사과해!” “??? 이게 미쳤나? 야!” “사과하라고! 이 새끼야! 이 할아버지가 왜 거지야? 내가 돈 냈는데!!!”
어리둥절 편의점 주인은 말문이 막혔다. 1년 넘도록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군소리 없이 고분고분하던 순둥이 아르바이트생은 이미 사라졌다. 회색 블라우스보다 더 날카롭게, 그녀의 애인보다 더 낮은 톤으로, 소녀는 편의점 주인을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사과해! 할아버지한테!”
몇 초 동안 멈칫, 겁까지 먹었던 주인이 평정을 아니 갑의 기세를 되찾았다. 비닐봉지에 샌드위치와 소시지를 확 처박더니 소녀 앞에 던졌다. “나가! 나가서 처먹어!” 소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끝까지 사과 않겠단 말이지?” 소녀 머릿속으로 뛰어들었던 푸른빛이 눈동자로 옮겨갔다. 소녀는 입구의 우산꽂이에서 천천히 찢어진 우산을 꺼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 속. 오른손으로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왼손에 우산을 든 소녀의 눈에는 그 푸르스름한 빛이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불꽃같았다. 간밤에 반지하 월세집 주인 앞에서 숨죽여 삼키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눈물에 배인 서러움과 분노는 세찬 빗줄기로도 식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할아버지에게로 우산을 기울이며 걷는 소녀의 옷은 흠뻑 젖었다. ‘이미 비에 잠긴 자는 우산이 필요 없다.’ 어디선가 보았던 글귀를 떠올린 소녀는 이젠 아예 우산 전체를 할아버지에게 양보했다. 이 상황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은 할아버지가 다시 쥐어짜는 목소리로 소녀를 바라본다. “배고파요. 배고파요.” 등에 맨 배낭도 홀라당 다 젖었다. 샌드위치도 소시지도 먹을 수가 없겠구나. 소녀는 어제 담배남 한돌과 함께 갔던 순댓국집이 있는 시장 골목을 향했다. 질질 끌려가듯, 기어가듯 폭우 속을 힘겹게 걷는 두 사람에게 도로에 고인 흙탕물을 튀기며 외제차들이 신나게 달리며 지나갔다. 그 풍경을, 까마득히 높은 키다리 빌딩들이 표정 없이 내려 보고 있었다.
아직 점심 먹기에는 이른 시각, 순댓국집은 텅 비어 있었다. 어제처럼 가게 구석에서 트로트 경연 재방송을 보며 마냥 홀로 즐거운 주인 여자가 소녀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물은 셀프야. 순댓국 두 개 줘?”
우산 전체를 씌워 드렸지만, 미친 폭우에는 역부족이었다. 쫄딱 젖은 할아버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주머니, 죄송한데... 마른 수건 한 장만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순댓국집 아줌마는 표정이랑 목소리만 무뚝뚝한 듯싶었다. 수건 두 장을 가져와 소녀에게 건네고는 벽걸이 선풍기가 할아버지를 향하지 않게 돌리면서 그녀가 말했다. “노인네한테는 여름 감기도 무서운 거야. 얼른 닦아드려.”
고기, 순대와 밥을 씹지도 않고 노인은 마시듯 삼켰다. “할아버지, 천천히 드세요. 입천장 다 까져요. 그러다 체해요.” 소녀는 전혀 입맛이 없었다. 국물만 두어 숟갈 떠먹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녀에게 말을 걸면서 주인 여자가 옆 테이블에 앉았다.
“돌멩이랑은 무슨 사이야?” “네?” “어제 같이 왔잖아. 돌이랑” “아... 돌멩이. 같은 데서 일해요.” “친한가 봐? 맨날 혼자 오는 녀석이 여자랑 같이 온 건 어제가 처음이여.” “저도 어제 처음 봤어요.” “아니, 처음 본 놈이랑 술을 마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소녀에게 아줌마가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혼자 주절거렸다. “애는 착해. 자주 와. 와서는 맨날 순댓국에 소주 1병만 혼자 먹고 가. 말도 없이 얌전히 밥만 먹고 가는데, 한 번은 저기 지물포 하는 젊은 놈이 나랑 시비가 붙었거든. 술이 떡이 돼서는 문 닫기 10분 전에 와서 술 달라고 지랄을 하길래, 내가 타박을 좀 했지. 아니 근데 그 양아치가 욕지거리를 함서 나한테 덤비드라고. 줘 팰 것처럼 말야. 그니까 조용히 밥 먹다 말고 돌멩이가 그 양아치 놈을 딱 한 방 갈기대. 난 크게 싸움 나겠구나. 경찰 불러 말어 하고 있는데, 양아치가 한 대 맞더니 꼼짝도 못 하고 그냥 슬슬 눈치 봄서 나가더라고. 아 그래서 이름이 돌멩인가 보다 했지 난. 뭐 하는 앤지는 몰라도 암튼 성깔은 똑 부러지는 거 같아.”
돌멩이 얘기를 무심히 듣다가, 오후 아르바이트가 떠오른 소녀는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마음이 바빠졌다. 할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고, 집에 가서 아빠 점심 차려주고, 레스토랑 출근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순댓국 한 그릇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마신 할아버지는 조금 기력을 찾은 모습이었다. ‘저녁은 또 어디서 드실 수나 있으려나...’ 걱정은 되면서도 소녀는 제 앞가림도 급한 처지였다. 안타깝지만 계속 옆에서 챙길 수는 없는 노릇. “할아버지, 댁 어디세요? 가까우면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대답 없이 노인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녀를 향해 넙죽 큰 절을 하는 할아버지에 소녀는 소스라치게 당황했다. “이러지 마세요.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고맙습니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올해 장마는 유난히 변덕스럽구나.’ 생각하며 소녀는 배낭과 우산을 챙겼다. 정신 나간 듯 쏟아지던 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친 바깥으로 나서자, 노인은 소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성냥 1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