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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불타는 성냥갑

성냥 던지는 소녀 - 05화

by rainon 김승진

정신 나간 듯 쏟아지던 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친 바깥으로 나서자, 노인은 소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성냥 1갑이었다.


“절대 버리지 말아요. 꼭 가지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쏟아지던 폭우의 잔향이 감도는 길 저편으로 작아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소녀는 손을 펼쳤다. 성냥을 마지막으로 구경한 게 언제였더라? 살짝 밀어서 성냥갑을 열어보았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모습대로 별 특별할 구석 없는 평범한 성냥갑을 주머니에 넣고 소녀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거실 반지하 깨진 유리창으로 들이친 빗물을 먼저 닦아낸 후, 소녀는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난밤 자기가 한 짓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아빠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간단한 점심상. 아침에 끓였던 김치찌개와 조미 김. 늘 그렇듯 부녀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집을 나서며 소녀는 돌아누운 아빠의 등에 한마디를 던졌다. “이따 유리가게에서 올 거예요. 초인종 누르면 문만 열어줘. 빼먹지 말고 약 챙겨 드시고!”


버스 안, 소녀의 눈과 손은 바빴다. 레스토랑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삶. 졸지에 해고당한 편의점이 그나마 일하기 편하고 틈틈이 책도 볼 수 있어서 괜찮았는데... 아쉽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오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짚어 보던 소녀는 또다시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온 그 푸르스름한 빛줄기를 떠올렸다. 점장한테 욕을 했다니...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구쳤던 것일까. 밟히면 밟히는 대로, 차이면 차이는 대로, 지렁이 같은 스스로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늘 고개 숙이며 고분고분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던 23년 삶에서, 아까의 사건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소녀 스스로도 새삼 놀라고 있었다. 결국 밟히는 것을 못 참고 지렁이는 꿈틀 했던 건가.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단어다. 늘 세 끼 밥걱정을 하며 살아온 삶이었지만, 단 한 번도 남의 것을 훔친 적도, 구걸한 적도 없었다. 동사무소에서 가져다주는 김치로 끓인 찌개를 좀 전에도 먹었지만, 손 벌려 빌어먹은 것은 아니잖아. 팍팍할지언정 그래도 제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온 삶은 거지가 아닌데... 결국 비에 젖어 먹지 못한 그 소시지와 샌드위치도 떳떳이 돈 내고 산 건데... 왜 내가, 할아버지가 거지라는 멸시를 받아야 하는 거지?


월요일 오후의 레스토랑은 한가했다. 주말의 서빙 전쟁을 치른 대가로 주어지는 여유로움. 3시가 넘어 가게가 텅 비자, 주방 설거지를 마무리한 소녀는 테라스 흡연 구역으로 나갔다. 오전에 거센 폭우가 지나간 탓인지, 빗물 조각을 여전히 머금은 공기의 비린내는 어제보다 더 심했다.


똑같은 그 구석자리에 돌멩이가 앉아서 담배를 죽이고 있었다. 힐끗 소녀에게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돌멩이는 잠자코 담배연기를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리고 툭, 꽁초를 재떨이에 던지고는 소녀의 옆 자리로 와서 털썩 앉았다.


“음악 들을래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돌멩이는 스마트폰의 볼륨을 높였다.


<I'm sorry but. Don't wanna talk. I need a moment before I go. It's nothing personal. I draw the blinds. They don't need to see my cry. 'Cause even if they understand. They don't understand. So then when I'm finished. I'm all 'bout my business and ready to save the world. I'm taking my misery. Making my bitch. Can't be everyone's favorite girl. So take aim and fire away. I've never been so wide awake. No nobody but me can keep me safe. And I'm on my way. The blood moon is on the rise. The fire burning in my eyes. No nobody but me can keep me safe. And I'm on my way.>

“Alan Walker의 On my way라는 곡이에요.” “처음 듣지만, 제법 좋은데요?” 소녀가 호응을 보이자, 돌멩이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링크 보내줄게, 나중에 또 들어봐요.”


퇴근 후 소녀는 출근길 버스 안에서 검색했던 레스토랑 근처의 다른 편의점을 찾았지만, 이미 사람을 구했다는 말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천천히 알아보자. 어딘가 일할 곳은 있겠지 뭐. 마음을 다독이며 버스를 기다리는 소녀의 앞으로 외제 스포츠카 한 대가 신호를 받고 멈춰 있었다. 무심코 스포츠카 안을 들여다본 소녀는 깜짝 놀랐다. 돌멩이였다.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뭐지? 대리운전인가? 아닌데. 혼자 타고 있잖아. 그럼... 자기 차라는 건가? 부자였어? 근데 왜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는 거야? 기름 값 벌려고?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은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러려니, 소녀는 관심을 끄고 버스에 올랐다.


반지하의 열대야는 더 뜨겁다. 혹시나 바람 한 점이라도 불어줄까 기대하며 열어둔 창문으로 지나가는 취객의 알아듣지 못할 괴성이 잠깐 들어왔을 뿐. 밤은 고요했다. 구인구직 어플을 뒤적이던 소녀는 문득 낮에 돌멩이가 들려주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링크를 열었다. 아까는 잘 들리지 않던 가사였는데 열대야의 고요 속에서는 더 또렷이 뜻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이 필요해.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냐. 블라인드를 쳤지. 그놈들이 내 우는 모습을 볼 필요는 없으니까.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해 못해. 그래, 준비가 끝나면 난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구하기 시작할 거야. 내 고통을 받아들여 노예로 삼을 거야. 모두에게 사랑받는 소녀가 될 수는 없으니. 정조준하고 쏴 버리는 거야. 지금 나는 아주 맑은 정신이야.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날 지킬 수 없어. 난 지금 내 길을 가는 거지. 핏빛 달이 떠오르고 있어. 내 두 눈에서는 불꽃이 솟구치지. 나 이외엔 그 누구도 날 지킬 수 없어. 난 지금 나의 길을 가고 있어.>


살짝 잠이 든 소녀의 감은 눈앞으로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어른거렸다. 푸른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눈을 뜬 소녀의 얼굴로 빛줄기가 파랗게 쏟아졌다.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곳은 낮에 갈아입기 전에 오전에 입었던 바지 주머니였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주고 간 성냥갑을 꺼냈다.


파랗게 성냥갑이 불타고 있었다.


Alan Walker - On my way

https://youtu.be/qc8vJLRbrz4


(성냥 던지는 소녀 - 06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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