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고 있었다. 파란 불꽃이 성냥갑을 휘감고 활활 타고 있었다. 하지만 성냥갑을 손에 든 소녀의 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전혀 뜨겁지 않았다. 불꽃은 여느 불꽃의 색깔이 아니었다. 정확히 그 빛깔이었다. 어제 레스토랑에서 갑질 검사 딸의 주문을 못 알아들었을 때, 오늘 편의점에서 노인을 쫓아내려는 점장에게 반말로 대들기 직전에, 바로 그 순간마다 소녀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다가 머릿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내 사라진 그 푸른빛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눈을 도저히 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순간 생각했다. 이 황홀한 아름다움이 제발 꺼지지 말았으면... 마음까지 환하게 따스하게 채우는 손바닥 위 파르란 불꽃의 춤에 소녀는 매혹되었다. 그러다
툭. 파란 불꽃이 한 방울 떨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의 조그만 한 덩어리가 불꽃에서 튀어나와 동그란 구슬로 허공에 맺혔다. 파란 불꽃 구슬은 영롱하게 빛나며 반지하 방 천장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성냥갑을 감싼 불꽃은 이내 사그라들면서 성냥갑 표면을 파랗게 물들였다. 이제는 그냥 파란색 성냥갑이다. 그러는 사이 천장 가까이 둥실, 천천히 솟구쳐 오르던 파란 불꽃 구슬이 다시 소녀의 눈앞으로 살며시 내려왔다. 그리고는
파란 불꽃 구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 걷는 속도만큼 앞으로 움직이는 불꽃 구슬이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임을 소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소녀가 불꽃 구슬을 따라서 발을 떼기 시작했다. 손에는 파란색 성냥갑을 쥔 채로, 소녀는 홀린 듯이 파란 구슬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자정이 가까운 거리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숨통 막히는 열대야의 열기를 비집고 파란 불꽃 구슬과 소녀가 걷고 있었다. 구슬을 따라서 소녀는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동네 놀이터다. 텅 빈 놀이터 구석 그네에 누군가 앉아서 구슬과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구슬이 바로 그 앞에서 멈췄다.
“안녕!” 하고 소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를 본 순간, 소녀는 생각했다. ‘덥지 않나?’ 온몸을 검은색으로 덮은 남자의 맨살이 드러나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검은 구두,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검은 재킷, 검은 가죽장갑, 검은 선글라스, 검은색 마스크... 하지만 블랙 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러다가 블랙 맨과 소녀 사이 공중에 떠 있던 파란 불꽃 구슬이 소녀의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머릿속으로 훅 뛰어 들어왔다. 잠깐 어지러움을 느끼려 할 즈음, 파란 빛줄기는 머릿속에서 스르르 녹듯이 사라졌다.
“누구... 시죠?” “성소녀 씨? 반가워.” “저를 아시나요? 저를 불러낸 게 당신인가요?” “그런 셈이지. 모든 만남은 운명인 거야.” “네?” “일자리를 구하고 있죠?” “네?” “아침에 일하던 편의점에서 받는 월급의 3배를 주겠어. 하겠어요?”
소녀는 떠올렸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뛰어든 푸르스름한 빛줄기, 진상 갑질녀의 욕설, 배고픈 할아버지와 편의점 주인, 또 머릿속으로 뛰어든 파란 빛줄기, 해고, 할아버지가 건넨 성냥갑... 난생처음 겪는 이틀 동안의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
“무슨 일을 하는 거죠? 제가?” “먼저 대답해요. 할지 말지.”
블랙 맨은 소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소녀는 직감했다. 뭔가의 흐름에 난 올라탔구나.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젠 내릴 수 없는 우주선에 이미 난 올라왔다. 도착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항해 도중에 이 우주선에서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겠구나. 본능적으로,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념과 각오가 뒤섞인 소녀의 심경은 묘하게도 가벼운 흥분과 설렘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편의점 페이의 3배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소녀는 돈이 필요했다.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면서 아빠의 약값을 대면서 살다가 끝나는 삶이고는 싶지 않았다. 공부도 하고 싶고, 냄새나는 낡은 운동화도 새 것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루라도 돈 걱정 없이 살아보고 싶었다.
“...... 하겠어요.” “좋아. 그럼 우리 계약은 성사된 걸로.” “이제 말해 주시죠. 제가 할 일이 뭔지를.”
“성냥갑 꺼내 봐요.” 소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파란색 성냥갑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크기는 똑같았지만 성냥갑은 더 이상 성냥갑이 아니었다. 플라스틱인지 쇳덩이인지 재질을 알 수 없는 딱 성냥갑만 한 크기의 파란색 직육면체 덩어리 한쪽 표면에 타원형의 버튼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버튼을 두 번 누르고 던지기만 하면 됩니다. 성소녀 씨가 할 일은 딱 그것뿐입니다. 단, 어디에 던질 것인지, 언제 던질 것인지, 제 지시에 정확히 따라 주기만 하면 됩니다. 언제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도 제가 알려드립니다. 성냥갑은 1회용. 던지면 끝이죠. 그때그때 새로운 성냥갑이 주어질 거예요. 평소에는 그냥 성냥갑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제가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면 모양이 지금처럼 변할 겁니다.”
“간단한 일이죠. 어렵지 않아요. 성소녀 씨에게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합니다. 성냥갑 던지는 일은 대략 1주일에 1번 정도. 경우에 따라 더 잦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절대 이 모든 것을 굳게 비밀로 유지해야 합니다.”
무슨 소리인지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걸 던지라고요? 근데 왜? 도대체 이게 정확히 뭐죠?”
검은 선글라스 건너로 소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