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글라스 건너로 소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다 입을 열었다.
“폭탄입니다. 고성능 폭탄.”
말문이 막힌 소녀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소녀에게 블랙 맨이 말을 이어갔다.
“일주일에 딱 한 개씩, 빌딩을 날릴 겁니다. 죽거나 다치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겁니다. 폭파 24시간 전에 신문사와 방송사에 예고 메일이 날아갈 테니까. 물론 메일 발신지는 추적이 불가능하고. 성냥갑 폭탄은 빌딩 외벽은 절대 건드리지 않아요. 빌딩 안쪽으로만 터집니다. 스물네 시간은 빌딩 안에 있는 개미와 바퀴벌레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대피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 우리의 목적은 건물만 폭파시키는 것.”
“우리...?라고요?” 소녀의 되물음을 무시하고 남자가 계속 말했다.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세상의 계단을 흔들 때가 왔어요. 반지하가 없으면, 1층이 없다면, 빌딩은 서 있을 수가 없어. 초고층 빌딩 꼭대기는 제 발바닥에게 항상 빚을 지고 있어요. 그런데... 최소한의 고마움도 모르지. 무엇이 빌딩 꼭대기 펜트하우스를 지탱해 주는지, 그들이 누리는 것들이 어떤 희생을 밟고 쌓아 올려진 것인지 너무 오랫동안 그들은 잊어버린 채 살고 있어. 그걸 가르쳐 주자는 겁니다.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지요.”
소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 레스토랑에서, 오늘 편의점에서 겪었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똑똑하지도, 아는 것이 많지도 않은 소녀였지만 남자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노로 비벼진 공감이 마음속에서 치솟았다. “거지 같은 년, 거지새끼, 거지 같은 년, 거지새끼, 거지, 거지, 거지...” 귓가에 메아리치는 명품 공주와 편의점 사장의 비아냥과 천대가 소녀의 혈관을 데우기 시작했다.
“가난이... 죄인가? 더럽고 낡은 것이 죄인가? 주머니가 가볍다고 사람까지 가벼운 취급을 받는 근거가 대체 뭐지? 몸에 걸친 것이 비싸면 상대를 깔보고 짓밟아도 되는 면허라도 생기나?”
“그래요. 맞아요. 알겠어요. 하겠어요. 하지만.” 심호흡을 하고 소녀가 말을 이어갔다.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돼요. 난 절대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요. 아무리 미워도.”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말했잖아요. 반드시 24시간 전에 예고할 거라고. 자 이제 갑시다.” “어디로?” “실전에 들어가기 전에 연습을 해야지. 그리고 예고 메일이 장난질이 아니라는 것을 언론인 나으리들에게 한 번은 가르쳐줘야 하잖아요.”
놀이터 옆 슈퍼 앞에 세워진 검은 승용차에 블랙 맨이 올랐다. 조수석에 탄 소녀가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하고 블랙 맨은 액셀을 밟았다. 열대야를 뚫고 검은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 거리를 40분 남짓 달린 끝에, 두 사람은 도시의 변두리 재개발 구역에 도착했다. 고만고만한 저층 건물들과 오래된 빌라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는 가로등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5분쯤 언덕을 올랐을까? 새벽에도 식지 않은 도시의 열기에 소녀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맨살 하나 드러내지 않고 온몸을 칠흑으로 덮은 남자는 전혀 더위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땀을 흘리며 소녀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놈은 사람이야? 귀신이야? 그리고 보니, 낮에 그 배고픈 할아버지가 성냥갑을 줬잖아? 그 성냥갑이 요술을 부려서 잠자는 사람을 불러내고... 그 할아버지 정체가 뭐지? 이 남자와 어떤 관계지? 그 푸른빛은 또 뭐였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만화야? 영화야? 왜 하필 나를 이 일에 끌어들인 거지? 아니, 그보다도... 이건 범죄행위인데, 내가 범인으로 잡히면 어떡하지?
꼬리가 꼬리를 무는 미스터리의 답을 남자에게 물어봐도 왠지 이놈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무렵, 재개발을 앞둔 죽은 동네에서는 그나마 가장 큰 8층 건물 앞에서 블랙 맨이 발을 멈췄다.
“성냥갑 꺼내세요.” “네? 네.” “자, 잘 들어야 합니다. 그 타원형 버튼을 처음 한 번 누르면 성냥갑과 성소녀씨는 사람이든 카메라든 그 무엇에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네?” “투명인간이 된다는 말이죠. 아무도 볼 수 없어요. 오로지 내 눈에만 보이죠. 한 번 눌러보세요.”
소녀가 버튼을 한 차례 눌렀다. 3초 정도 진동이 울리고 성냥갑을 시작으로 소녀의 손과 팔, 그리고 몸 전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어? 어?” “놀랄 필요 없어요. 너 죽는 거 아니야. 그대로야.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지.”
진정을 되찾은 소녀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있나요?” “이제 버튼을 한 번 더 눌러요. 그리고 건물 안으로 성냥갑을 던져요.” 소녀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버튼을 누르고 텅 빈 8층 건물 입구를 향해 투명한 성냥갑을 툭 던졌다. 남자는 손목시계의 스톱워치를 켰다. “새벽 1시 10분. 이제 앞으로 24시간.”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열어 뭔가를 눌러댔다. “예고 메일 발송 완료.”
“이제 저를 원래대로 돌려놔줘요!” “흥분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요. 성소녀 씨가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상태가 되었을 때, 원상태로 돌아옵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버튼을 눌러서 투명인간이 되세요. 그리고 성냥갑을 던지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원래 상태가 될 거예요. 차로 갑시다. 차에 타면 투명인간에서 벗어나게 해 줄게요.”
다시 놀이터. 소녀를 내려주며 블랙 맨이 말했다. “늦었으니 들어가서 잘 자요. 고생 많았어요. 내일 새벽 1시 10분에 TV를 켜 보세요.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그때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블랙 맨의 검은 승용차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다가 소녀는 그제야 남자의 차에 번호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