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08화
블랙 맨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재개발 구역 철거예정 건물에 소녀가 성냥갑 폭탄을 던진 후 정확히 23시간 59분. 블랙 맨의 손목시계 스톱워치가 제로를 향해 1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각. 새벽 1시 9분. 소녀는 거실의 TV를 켰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 보니, 한 뉴스 케이블 화면이 어제 그 8층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 미친놈의 장난이겠거니... 읽히다 말고 휴지통에 당연히 버려질 것이라는 예상에도 예외는 있었던 것이다. 멀찍이 건물을 뒤로하고 기자는 마이크에 열심히 침을 튀기고 있었다. “제 뒤에 있는 건물이 바로 익명으로 폭파 예고된 철거 예정 빌딩입니다. 이제 그 시점이 거의 임박했는데요. 단순한 장난으로 넘기기에는 뭔가 미심쩍다고 판단해서 저희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폭파 예고 메일은 기술적으로 그 발송처를 추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도 이것이 그저 장난에 그치기를 바라고 있는데요... 꽝!” 엄청난 굉음에 놀란 기자가 마이크를 떨어뜨리고 귀를 막으며 쓰러지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새벽 1시 10분. 자는 아빠를 깨울까 봐 볼륨을 작게 해 둔 게 다행이구나. 이 시각 이 채널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고막이 찢기는 충격을 받았겠구나. 카메라가 비추는 8층 빌딩의 겉모습은 멀쩡했다. 분명 건물을 날린다고 했는데? 아! 맞다. 블랙 맨이 말했었지. 폭탄은 건물 외벽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정신을 차린 듯, 기자는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와 함께 건물 쪽으로 향했다. “뭔가가 터지는 커다란 폭발음을 시청자 여러분들도 들으셨을 겁니다. 현장에서 200미터가량 떨어진 제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주 큰 소리였는데요. 보시다시피... 아... 건물은 그대로입니다. 건물 안쪽만 폭파된다고 예고 메일은 말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용감한 기자가 건물로 다가가는 모습을 뒤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 그대로 화면이 전진하는 동안, 사이렌 소리도 빌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화면이 반으로 나뉘고, 왼쪽 화면이 빌딩을 향하는 기자의 뒤통수를 비추는 것과 함께 오른쪽 화면에서는 블랙 맨의 폭파 예고 메일이 자막으로 띄워졌다.
<이 메일이 발송된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후에, 첨부한 약도에 표시한 빌딩이 폭파된다. 폭파를 막을 방법도, 메일의 발송인을 찾을 방법도 절대로 없으니 헛수고는 말기를 바란다. 빌딩 외벽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것이 가루가 될 것이다. 처음 한 번, 이번만은 철거를 앞둔 비어있는 빌딩을 제물로 삼겠다. 앞으로는 실제상황이다. 24시간 전에 다시 알리겠다. 우리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빌딩 몇 개가 폐허가 될지는 너희들의 선택에 달렸다. 끝.>
소녀는 TV를 껐다. 리모컨을 내려놓자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누가 걸었는지 소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데뷔작 잘 보셨나요?” “TV 화면으로 봐서... 잘 모르겠어요. 겉보기엔 멀쩡하던데. 한 번 구경하러 가도 되나요?” “노! 폴리스 라인 때문에 접근 못할 겁니다. 이따 오전쯤이면 뉴스에서 친절히 보여줄 거니까, 그때 구경하세요.”
잠시 침묵. 몇 초가 흐르고 블랙 맨이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다음부터는 실전. 일주일 뒤에 연락드리죠. 약속한 대로 급여를 입금했어요.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오전 시간에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일주일 동안은 오전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시고. 그럼 이만.”
불을 끄고 소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철이 들기 전부터 소녀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가치를 일찍 깨우쳤다. 떨쳐낼 수 없는 거머리 같은 가난은 소녀의 뼛속과 내장 속까지 스며들어 세포 하나하나까지 낙인을 찍었다. 늘 ‘손님’들 앞에서 굽신거린 삶 속에서 소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손님’이라는 말이나 대접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소녀에게 시급이나 월급을 주는 ‘주인’님들의 거친 말과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삶 속에서 소녀는 단 한 번도 ‘주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이 새벽. 빌딩이 안으로 터지는 굉음과 함께, 소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주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 낡은 운동화로만 떨구었던 두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게의 손님이거나, 가게의 주인이거나 누군가의 돈 앞에서 언제나 초라하고 볼품없던 두 손. 소녀는 오므려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쟁반을 나르고 접시를 닦던 이 두 손으로 아무도 모르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제 이 손으로 세상을 혼내주고 싶다. 오래간만에 소녀는 푹 단잠에 빠졌다.
살면서 몇 번 경험해 보지 못한 달콤한 오전 늦잠에서 깬 소녀는, 배고프다고 투덜대는 아빠 앞에 가난한 아침 밥상을 가져다 놓고서 TV를 켰다. 이제는 거의 모든 채널에서 재개발 구역 8층 빌딩의 겉과 속을 샅샅이 비추고 있었다. 빌딩 안은, 블랙 맨이 메일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가루들뿐이었다. 외벽만 멀쩡하게 덩그러니 남은 빌딩 속의 모든 내부 구조물과 집기들은 깡그리 폭파되었다. 으레 그러했듯이, 몇몇 채널들은 비싼 정장으로 몸을 휘감은 정치인과 교수와 변호사를 타원형의 테이블에 앉혀 놓고 이번 사건의 배경과 전망을 제멋대로 넘겨짚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 국민이 다 암송하게 하려는 것인지 블랙 맨의 메일 전문은 수시로 화면 자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소녀는 집을 나섰다. 레스토랑이 있는 도심 번화가로 달리는 버스 안, 스마트폰에 처박힌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온통 만화 같은 새벽의 폭파사건에 쏠린 듯했다. 장마가 끝난 건가. 차창을 살짝 열자 빗물 비린내가 한결 가신 듯 어제보다는 햇빛 향기가 더해진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소녀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점장도, 매니저도, 직원들도, 손님들도. 모두가 새벽 재개발 구역 8층 빌딩 폭파사건이 화제였다. 짐짓 무심한 척, 열심히 접시를 닦고 나르는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수시로 번졌다. 미소는 소녀의 가슴속으로까지 파고들었다. 마음속이 환해졌다. 어디서 본 듯, 느낀 듯한데... 뭐였더라? 아! 그래. 성냥갑! 할아버지가 손에 쥐어주고 갔던, 그리고 8층 빌딩 내부를 깨끗하게 날려버린 그 성냥갑이 잠든 소녀를 깨우고 소녀의 손바닥 위에서 파랗게 타오르던 그때! 바로 그 기분 좋은 황홀감이 소녀의 마음을 계속 채우고 있었다. 9시 퇴근 시간이 되도록 사라지지 않는 그 느낌을 안고 가게를 나서 퇴근하는 소녀에게,
한돌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술 한 잔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