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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테러리스트

성냥 던지는 소녀 - 09화

by rainon 김승진

가게를 나서 퇴근하는 소녀에게 한돌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술 한 잔 할래요?”


순댓국집 입구 테이블에는 잔뜩 취한 두 남자가 옥신각신 뭔가를 다투고 있었다. 역시나 트로트 경연 재방송을 보며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아줌마에게 돌멩이는 생색내듯 주문을 했다. “이모! 수육 한 접시랑 소주 1병이요!” 저번과는 달리 반색을 하며 주방에 들어가는 주인 여자가 소녀에게 알은체를 했다. “자주 보네. 오늘은 얼굴이 좋아 보여.”


배추김치, 깍두기, 새우젓, 생양파 몇 조각에 된장. 그리고 녹색 소주병과 잔 2개. 익숙함은 편안함. 세 번째 온 이 집이 그새 소녀는 아늑하게까지 느껴졌다. 서로에게 첫 잔을 따라주는 두 사람 귓전으로 입구 두 취객의 설전이 그대로 다가왔다.


“아니, 그래서 그게 잘한 짓이란 거야?” “그럼! 잘한 짓이지. 이놈의 개 같은 세상 확 다 뒤집어엎어야 해!” “야, 임마! 니 어렸을 때를 생각해라. 밥 안 굶는 게 어디여? 응? 우리 같은 놈들이 하루 벌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걸 감사해야지. 응? 세상 다 뒤집어지면 제일 먼저 누가 죽는지 알기나 해?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들이여! 있는 놈들은 끄떡도 없어. 갸들은 전쟁이 나든, 세상이 망하든 다 살아.”


‘오늘 밤, 거의 모든 술자리의 안주거리를 내가 만들었구나.’ 소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종편 채널들의 긴급 대담. 값비싼 정장으로 몸을 휘감은 교수와 정치인과 변호사들의 수다를 통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간밤의 빌딩 폭파 사건이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 테러’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런 거창한 주제에는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그저 하늘 끝으로 치솟은 고층 빌딩들의 으스대는 높은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쾌감이 소녀에게는 짜릿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설레발들은. 풉.’ 아무도 모르는 보물지도를 가슴에 품은 사람처럼, 소녀는 신이 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수육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념이나 정책? 그런 거창한 것을 깨부수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화풀이인 거지. 빌딩 몇 개 없어진다고 이 사회구조가 달라지나? 테러범도 그걸 잘 알 테고.” 잔을 부딪치며 돌멩이가 말했다. 소녀는 잠자코 있었다. 쭈욱 한 잔 들이켠 한돌이 말을 이어갔다. “근데 참 신기하긴 해. 어떻게 건물 외벽은 그대로 남기고 내부만 폭파할 수 있지? 물리적으로 그게 가능한가?” 두 번째 잔을 채우며 돌멩이가 아줌마를 불렀다. “이모! 여기 술국 하나 끓여 주세요! 국물이 없으니 소주가 영 퍽퍽하네.”


“근데 비겁해.” 돌멩이가 말했다. “뭐가요?” 소녀가 물었다.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밝혀야지. 전 세계 곳곳에서 못된 짓들만 골라서 하는 테러단체들도, 테러 전후에는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당당하게 선언을 하거든. 얼굴 없는 테러. 비겁한 거죠.” 소녀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발끈했다. “그건 힘이 센 테러범들 얘기죠. 가진 무기가 비슷해야 대등하게 당당하게 싸우는 거 아녜요?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범죄라면, 없이 사는 누군가가 저지른 일일 텐데. 그리고 원래 테러라는 게 보이지 않게 기습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요? 게릴라처럼.”


돌멩이가 놀란 듯했다. “싸우자는 거 아닌데... 흥분하지 마요. 근데 소녀 씨는 어제 일 저지른 놈들 편인가 봐요?”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순간 흠칫하다가 소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누구 편이고 아니고 그런 게 어딨어요? 걍 그렇단 거지. 암튼 난... 없이 사는 인간들 중에 하나고... 세상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외벽은 멀쩡히 놔두고, 건물 안쪽만 폭파시킨다? 그런 신무기를 가진 놈들이 과연 약자일까? 난 그게 이상해요.” 하긴 그랬다. 소녀가 생각하기에도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블랙 맨은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을까. 아니 그전에, 대체 그 성냥갑이 파랗게 불타오르던 것은? 파란 불꽃 구슬이 공중을 떠다닌 것은? 새삼 자신에게 벌어진 그 초자연적 현상들이 의아했다.


“고기 많이 넣었어. 맛있게들 먹어. 소주 한 병 더 줄까?” 늘 순댓국만 시키던 돌멩이가 오늘은 예뻐 보였는지, 주인 여자의 목소리는 상냥하기까지 했다. 그때, 입구 테이블의 두 남자가 외쳤다. “아지매! 여기 계산이요!”


카운터는 소녀와 돌멩이가 앉은 테이블 바로 옆이었다. 두 남자 중 다리를 약간 절룩이는 키 큰 남자가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아까 둘 사이 옥신각신에서 테러범을 비난하던 쪽이었다. “그래두 어쨌거나 말이지. 진짜로 빌딩들이 계속 무너지면 우리 같은 하루벌이 노가다들한테 나쁠 건 없을 거여? 그제? 아 무너지면 또 짓지 않겄어? 불경기에 일거리 늘어나는 것 마냥 좋은 게 어딨나?”


건설 노동자 두 사람이 가게를 나가자, 돌멩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2차 대전으로 폭삭 망했던 일본이 기사회생하면서 고도성장한 것이 한국전쟁 때문이었지. 그래... 그렇지...” 소녀는 한돌을 쳐다봤다. 말하는 것을 보니 제법 똑똑하고 논리적인 이 남자에게 소녀는 슬슬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주 세 병을 비우고 둘은 가게를 나섰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통장 잔고가 늘어난 소녀가 간만에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꺼냈다. 장마가 끝난 여름밤 공기는 습기가 있던 자리를 열기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뵐게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면서, 소녀는 돌멩이에게 물어보려다 결국 깜빡한 궁금함을 기억해냈다. “근데, 차 좋은 거 타고 다니던데? 본인 차인가요?” 며칠 전,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가던 한돌의 모습이 떠오른 소녀는 생각했다. ‘잘 사는 집인가 봐...’ 잠깐 생길 뻔했던 호감이 저절로 사라졌다. ‘내 주제에 무슨...’


돌멩이가 알려준 곡. <Alan Walker의 On my way>를 플레이시키고 소녀는 이불을 폈다.


<... 난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구하기 시작할 거야. 내 고통을 받아들여 노예로 삼을 거야. 모두에게 사랑받는 소녀가 될 수는 없으니. 정조준하고 쏴 버리는 거야. 지금 나는 아주 맑은 정신이야.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날 지킬 수 없어. 난 지금 내 길을 가는 거지. 핏빛 달이 떠오르고 있어. 내 두 눈에서는 불꽃이 솟구치지...>


갑자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블랙 맨이었다.


(성냥 던지는 소녀 - 10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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