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블랙 맨이었다.
놀이터. 녹슨 그네 쇠사슬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여름밤의 적막을 날카롭게 긁고 있었다. 똑같은 옷차림. 덥지도 않나? 오늘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네? 입가 언저리를 빼고는 온 몸을 검게 감싼 블랙 맨이 그네를 앞뒤로 굴리면서, 다가가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그 옆 그네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 뒤 연락하신다더니...” “미안해요. 좀 서둘러 앞당겨 진행하는 게 낫지 싶어서. 일주일 간격은 너무 길어요. 꼬리를 잡힐 가능성은 제로지만... 틈을 주지 않고 몰아서 쳐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우리에게는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블랙 맨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 일 하기로 한 결정, 후회는 안 하는 거죠?” 칙... 딸깍! 성냥갑만한 쇳덩이 라이터의 덮개를 덮으며 남자가 물었다. 잠깐 생각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다.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일을 해야죠. 후회 같은 건 없어요. 좀 재밌기도 해요. 내가 뭔가 일을 저지른다는 게. 시원하기도 하고. 난...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했어요. 어려운 건 잘 몰라요. 그치만... TV 뉴스로 망가진 빌딩 안을 보면서, 내 속에 쌓였던 억울함이랄까, 서러움? 그런 게 좀 풀리더라구요.”
“그래요. 이제 시작합시다. 받아요.” 성냥갑을 건네받은 소녀를 블랙 맨이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 오전 10시 정각. 투척 장소는 소녀 씨가 얼마 전까지 일했던 그 편의점 빌딩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 소녀의 입가에 살짝 잔인한 미소가 스쳤다. 할아버지와 나를 거지라 불렀던 사장 놈아. 이제 네놈이 한 번 거지가 되어봐라. 바늘로 찌르면 피 대신 돈다발이 흐를 것 같은 편의점 점장에게, 소녀는 털끝만큼의 동정도 없었다.
“출발 전, 집 화장실에서 버튼을 누르고 모습을 감추세요.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로 들어가면 원래 상태로 돌아옵니다. 폭파 시점은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모레 오전 10시. 소녀 씨가 성냥 폭탄을 설치하는 내일 오전 10시에 각 언론사로 예고 메일이 날아갑니다.”
조심조심 주머니에 성냥갑을 넣고 그네에서 일어서는 소녀에게 블랙 맨이 말했다. “뭔가를 깨끗이 씻어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게 뭔지 아나요? 뒤흔들고 두들겨 패야 해요. 마치 세탁기처럼... 우리는 지금, 이 더러운 세상을 세탁기에 넣는 겁니다.”
블랙 맨과 헤어져 돌아와 잠든 소녀의 꿈에 엄마가 나타났다. 소녀의 지갑 속 사진 모습 그대로, 주방 창가 늦은 오후 햇살을 등에 맞으며 젊은 그녀는 소녀의 소풍 김밥을 말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엄마의 김밥이었기에, 소녀는 꿈속에서도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른 맛을 보고 싶은 꿈속 어린 소녀는 썰기도 전에 김밥 한 줄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막 씹으려는 순간, 김밥은 성냥으로 변했다. 어린 소녀의 팔뚝만한 성냥은 다시 꼭지에 도화선이 달린 다이너마이트로 변했다. 내 김밥! 울음을 터뜨리며 소녀는 벌떡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4시. 안방에서 아빠가 코 고는 소리가 세간살이 몇 개 안 되는 반지하 연립주택에 동굴 속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아침 8시 반. 결국 새벽잠을 버린 소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성냥갑은 모습이 변해 있었다. 플라스틱인지 쇳덩이인지 재질을 알 수 없는 딱 성냥갑만한 크기의 파란색 직육면체 덩어리 한쪽 표면에 타원형 버튼. 심호흡 한 번. 소녀는 버튼을 눌렀다. 3초 간 진동 후, 성냥갑 폭탄부터 소녀의 손과 팔, 가슴이 물감 번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녀는 공기 덩어리가 되었다. 성냥갑 폭탄을 주머니에 넣고 소녀는 현관을 나섰다.
휙휙.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행여 부딪칠까, 길을 걷는 소녀는 요리조리 지뢰를 피하듯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투명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 전체가 사라진 상태로 소녀는 모든 유체물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었다. 버스 요금을 떼먹고 싶은 마음은 10원어치도 없었지만, 카드 단말기가 저 혼자 삑 소리를 내게 할 수는 없었기에 소녀는 마음속으로 죄송합니다... 속삭이며 버스에 올랐다. 출근 시간대가 지난 한산한 버스 스피커. 라디오 진행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막심 므라비차는 1975년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곧 여러 국제 콩쿠르를 휩쓸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죠. 그가 어렸을 때는 유고 내전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속에서 피아노를 배운 그의 연주는 폭발적이고 격정과 에너지가 넘치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연마한 그의 열 손가락이 노래하는 대표곡 크로아티안 랩소디를 듣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 이 슬픈 아름다움은 파괴의 고통을 자양분으로 삼아 피어나는 것인가! 함께 들으시겠습니다. 막심 므라비차의 크로아티안 랩소디.”
처음 듣는 선율에 소녀는 귀를 빼앗겼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슬프면서도 당당한 멜로디는 굳세고 꿋꿋했다. 눈물과 미소를 함께 자아내는 이 곡. 좀 이따가 성냥갑을 던지는 내게 용기가 될 것 같아. 라디오에서 음악이 끝나자, 소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으로 곡을 검색했다.
20층 빌딩 앞. 빌딩 출입구 옆 1층 편의점 통유리로 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소녀의 후임으로 온 새 알바생을 세워두고 사장 놈은 뭔가 화를 내면서 간혹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새 알바생은, 소녀가 그러했듯이, 소녀의 전임자, 전전임자 모두가 그러했듯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서 제 신발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기다려. 내가 복수해줄게. 소녀는 사장을 노려보던 서늘한 눈빛을 거두고 빌딩 정문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았다.
스마트폰 화면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크로아티안 랩소디(Croatian Rhapsody) 선율의 리듬에 맞춰 걷는다. 뚜벅뚜벅.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을 연다. 성냥갑 폭탄을 꺼낸다. 싸구려 전자시계의 숫자를 보며 정각 오전 10시를 향해 카운트다운.
6, 5, 4, 3, 2, 1.
버튼을 누르고 성냥갑을 던진다.
제로.
Maksim Mrvica - Croatian Rhapsody
(성냥 던지는 소녀 - 11화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