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11화
카운트다운. 6, 5, 4, 3, 2, 1. 버튼을 누르고 성냥갑을 던진다.
제로.
집 화장실로 돌아온 소녀는 원래대로 찾은 제 모습에 안도했다. 문득 아까 빌딩 1층 편의점 통유리 창문 너머로 보였던 새 알바생이 생각났다. 사장 놈에게 뭔가 크게 혼나던 그녀는 소녀와 얼추 비슷한 또래로 보였었다. ‘기다려. 내가 복수해줄게.’ 마음으로 외치며 성냥갑 폭탄을 던졌었는데, 이제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알바생은 며칠 일도 못하고 새 일자리를 구해야 하겠구나... 해고든, 개인 사정이든 그만두고 나서 새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님을 잘 아는 소녀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장 놈 편의점이 박살 나는 것은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빌딩 하나를 통으로 부쉈을 때, 그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을 사람들... 소녀는 세면기 수도꼭지를 틀었다. 투명인간으로 있을 동안에는 미처 몰랐었는데 소녀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알아챌 수 없었다지만, 성냥갑 하나 툭 던지는 것이 이렇게나 극도로 긴장되는 일이라니... 편의점 페이의 3배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소녀는 생각하며 땀범벅인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소녀는 거울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찬찬히 오래도록 들여다본 것이 몇 년 만 인 듯했다. 거울 속 스물세 살 여자. 지독한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온 시간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입술을 달싹이며 거울 속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거울 속 소녀는 답을 하지 않았다.
얼굴의 물기를 닦고 나오자, 테이블 위 스마트폰이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블랙 맨이었다. “수고 많았어요. 소녀 씨가 성냥갑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예고 메일이 발송됐습니다. TV 켜보시죠. 아, 그리고 내일 오전 9시에 놀이터 옆 슈퍼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냥 차에 타시면 됩니다.”
TV 뉴스는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래, 세상의 모든 불행들이 너희 신문과 방송의 밥이고 반찬이지. 니들 신나라고 성냥갑 폭탄을 던진 건 아닌데... 화면 속 20층짜리 편의점 빌딩 앞은 그새 각 방송사들의 취재 차량들과 카메라, 기자들로 북새통이었다. 빌딩 바로 앞에 쳐진 폴리스 라인 뒤로 방패를 든 전투경찰들이 빽빽이 건물을 감싼 가운데, 빌딩 현관은 성냥갑 폭탄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은 귀중한 물건과 집기들을 벌써부터 바쁘게 토해내고 있었다. TV 화면 왼쪽 상단에는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시계가 초 단위로 역주행 중이었다. 22:27:45, 22:27:44, 22:27:43...
뉴스 자막은 블랙 맨의 예고 메일을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이 메일이 발송된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후에, 첨부한 약도에 위치한 빌딩이 폭파된다. 폭파를 막을 방법도, 메일의 발송인을 찾을 방법도 절대로 없으니 헛수고는 말기를 바란다. 빌딩 외벽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것이 가루가 될 것이다. 떳떳지 못하여 악취가 진동하는 모든 더러운 부(富)의 탑들이 주저앉는 날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끝.>
<더러운 부(富)의 탑들이 주저앉는 날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소녀는 그 자막을 작게 소리 내어 읽었다. 그래, 나는 블랙 맨과 함께 바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세상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있는 거야. 그래, 멈추지 않을 거야.
정부의 긴급 대책회의 장면을 배경으로 뉴스 앵커는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잠시 후면 어김없이, 비싸게 차려입은 교수와 정치인과 변호사가 또 타원형 탁자에 둘러앉아서 만담 쇼들을 하겠지. ‘근본적으로 언론이라는 존재는 가진 놈들 편’이라는 사실을 깨닫다가, 소녀 자신에게 소녀는 놀랐다. 이런 생각은 감히 해 본 적이 없는데...
김치찌개가 질린다는 아빠의 투정으로, 오늘은 된장찌개를 끓여냈다. 된장찌개와 김치와 조미 김. 가난한 밥상을 차리고, 먹고, 치우고... 설거지를 마친 소녀의 등 뒤로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술 떨어졌어! 가서 좀 사 와!” 말린다고 안 먹을 사람도 아니고, 술이 유일한 삶의 낙이자 의미인 아빠에게 소주는 엔진을 돌게 하는 휘발유였다. 소녀는 지갑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아빠의 휘발유병들을 냉장고에 채우고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되걸자 익숙한 목소리. “잘 쉬고 있어요? 저 돌이에요. 한돌.” 가르쳐 주지도 않은 내 전화번호를 이놈 저놈 어떻게 다들 잘도 아는 거지? 기분이 상한 소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번호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아! 매니저 형한테 물어봤어요. 소녀 씨한테 급히 뭐 좀 물어볼 게 있다고 하고.” “그럼 그 급한 질문 어서 하세요.” “아! 다름이 아니고... 음. 저... 음... 오늘 레스토랑도 쉬는 날인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영화나 볼래요?”
“네?” 소녀는 당황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대답을 바로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거 뭐지? 데이트 신청이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자의 관심이나 같이 영화 보자는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소녀였기에,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마음은 허둥지둥.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나오면서 퇴근길에 같이 술 한 잔 하자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경우였다. 침묵을 깨고 소녀가 대답했다. “그래요. 뭐. 할 일도 없고 오늘은.”
돌멩이는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올라가요. 뭐 볼까요? 우리?”
우리? 우리! 우리...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블랙 맨도 소녀에게 ‘우리’라고 했었다. TV 화면을 덮은 블랙 맨의 메일도 ‘우리’라고 했었다. <더러운 부(富)의 탑들이 주저앉는 날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 폐인 한 명 말고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소녀를 향해 ‘우리’라는 말을 해 준 사람... 그리고 보니 그동안 없었다. 시큰둥한 표정과는 반대로 소녀의 마음은 훈훈해졌다.
평일 오후 영화관은 한산했다. 영화관에 남자와 단둘이, 그것도 커플 석에 함께 앉은 건 소녀의 삶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소녀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엄마의 김밥 꿈에서 깨고 나서 새벽 4시 이후로 온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소녀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살포시 잠겨 드는 단잠...
깨어난 소녀는 돌멩이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