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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오로라

성냥 던지는 소녀 - 13화

by rainon 김승진

“A shoulder to cry on.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


노래를 듣는 동안, 소녀와 돌멩이는 위스키 두 잔을 더 비웠다. 그 사이 검사와 건물주를 부모로 둔 입 더러운 금수저 아가씨는 두 사람을 흘겨보며 바를 나가버렸다. 소녀가 물었다. “돈... 많아요?” 돌멩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돈이 많나 봐요? 어떤 기분이에요? 돈이 많으면?”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을 더 비우고 돌멩이가 되물었다. “돈이 많으면 죄인가? 꼭 그렇게 추궁하는 것 같이 들리네요.” 소녀가 피식 웃었다. “돈 많은 게 뭐가 죄에요? 그 반대지. 이 세상은 가난을 죄로 만들잖아요.”


“가난도 부도 죄 아녜요. 그냥 적고 많은 차이일 뿐이지.” 소녀가 돌멩이를 쳐다봤다. “이봐요. 없이 살아본 적 없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적고 많고 차이? 그 차이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요? 라면 1개를 셋으로 쪼개서 하루 버텨본 적 없죠? 함부로 말하는 거 아냐.” 돌멩이가 고개를 돌렸다. “부모를 내가 선택했나? 태어나 보니 이런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럼 돈 많아서 죄송하다고 이마에 써서 붙이고 다니기라도 할까요?”


“싸우자는 거 아녜요. 말싸움한다고 답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각자 입장이 다르니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거야. 미안해요. 괜히 시비 걸어서.” 소녀가 육포 한쪽을 입에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건 궁금해요. 먹고 살 걱정 없는 처지일 텐데, 왜 레스토랑 서빙 일을 해요? 기름 값 벌려고? 무슨 블랙카드 쓴다면서요? 1년에 카드만 2억 5천을 긁는 사람이 뭐가 아쉽다고? 레스토랑 월급, 그쪽에게는 푼돈도 안 될 텐데...”


돌멩이가 바텐더를 불렀다. “민규야. 여기 육포랑 치즈 좀 더 가져와. 그리고 너 내가 아멕스 블랙 쓴다고 말하고 다니니?” 바텐더가 당황하며 변명했다. “아니 그게, 형. 아까 희진이 누나, 아니 저쪽 손님이 뭐라고 그러면서 형 무시하길래... 그만. 미안해요. 형.” “그 입에 걸레 문 여자애 이름이 희진이냐? 아무튼 내 얘기 다른 데서 하지 마라. 절대로.”


“나중에 식당을 열고 싶어서요. 이것저것 바닥부터 배우려고 일하는 거예요. 일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그 봐. 역시 가진 자의 여유라니까. 한돌 씨는 재미로 일하잖아. 난 그렇지 못해요. 말 그대로 먹고살려고 일하는 거야. 우리는 결코 같은 처지가 아녜요.” 돌멩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잔을 더 마시고 소녀가 말했다. “좋겠네요. 일이 재미가 있다니. 바로 그 차이야. 통장에 숫자가 길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거. 통장 숫자가 0에 가까워지면 얼마나 숨이 막히는데...”


“그래서... 소녀 씨는 내가 불편한가요?” 대답 대신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요. 너무 많이 마셨어.” 한돌이 함께 일어섰다. “데려다 줄게요.” “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잘 마셨어요. 내일 가게에서 봐요.”


살짝 비틀거리며 걷는 소녀 뒤로 돌멩이가 따라오고 있는 것을 소녀도 알았지만 굳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버스 정류장. 밤공기의 열기는 확실히 약해져 있었다. 둘은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나 좋아해요?” 소녀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돌멩이가 냉큼 대답했다. “네. 좋아해요.” “날 어딜 봐서 좋아해요? 난 예쁘지도, 잘나지도 않았는데... 돈도 없는데.” 버스가 오자 두 사람은 함께 올라 나란히 좌석에 앉았다. 덜컹거리는 시내버스 안. 침묵. 소녀와 돌멩이는 달동네 언덕 밑 정류장에서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별로 멀지 않아요.” “조심히 들어가요. 잘 자고.” “네.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소녀의 등 뒤로 돌멩이가 외쳤다. “난 너 그냥 좋아하는 거야! 이유 없어! 그냥!”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짜식. 이젠 아예 말을 놓네?” 아까 도심에서 둥글게 밝던 달빛이 먹구름에 잠겼다. 오늘 밤, 달동네에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9시. 놀이터 옆 슈퍼 앞. 소녀는 블랙 맨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내비게이션 화면에서는 TV 뉴스 특보가 한창이었다. 화면 왼쪽 상단의 카운트다운 시계. 00:59:23, 00:59:22, 00:59:21. 빌딩 주변 상공을 맴도는 헬기의 카메라가 빌딩을 상하좌우로 훑어 내리고 있었다. 뉴스 앵커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긴장감이 화면에 비친 빌딩과 그 주변에서도 팽팽하게 느껴졌다. “현재 빌딩 내부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당국은 최종 확인했습니다. 빌딩 안 사무실들의 주요 시설물과 필수 설비들도 분리 반출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대피가 완료된 상태입니다. 만약 예고대로 폭파 테러가 진행된다면 현재 추산되는 재산 손실은 대략...” 액수를 다 듣기 전에 차는 멈췄다. 산 중턱의 공원. 그리 멀지 않은 시야에 빌딩과 헬기들이 모두 보이는 자리. 블랙 맨이 말했다. “VIP 관람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멀리서 보니 초콜릿 색 빌딩 주위를 맴도는 군경과 방송사의 헬기들이 마치 초콜릿을 노리는 파리 떼처럼 보였다. 이제 좀 있으면 껍데기만 남기고 녹아 사라질 거대한 초콜릿 덩어리가 탁 트이게 바라다 보이는 공원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았다.


“10분 남았어요.” 블랙 맨이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에서 캔 맥주를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나무들이 토해내는 습기의 향과 함께 마시는 맥주는 더 시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오전 10시가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온통 덮은 시커먼 먹구름 탓에 하늘은 컴컴했다. 소나기를 예고하는 번개가 검은 구름 안쪽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30초.” 바로 24시간 전, 빌딩 1층 편의점 옆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에 성냥갑을 던지던 그 순간의 느낌이 소녀의 정수리에서부터 몸 전체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짜릿한 기분에 섞이려는 듯, 바로 그 파란색 빛줄기가 소녀의 눈으로 뛰어 들어왔다. 블랙 맨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0, 9, 8, 7, 6, 5, 4, 3, 2, 1. 제로.


좌우로 진동하며 빌딩은 무시무시한 굉음을 비명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자 겉은 멀쩡한 빌딩 옥상의 피뢰침과 구조물이 아래로 푹 꺼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리고 빌딩의 비명 밖으로, 빌딩 꼭대기로 먹구름보다 더 짙은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몇 초 후, 내부의 모든 것들이 부서져 주저앉으며 피어난 먼지구름 위로 선명한 파란색 불꽃이 춤을 추었다. 소녀의 동공이 한껏 커졌다.


파란색 오로라.

난생처음 만나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에 소녀의 숨이 멎는 듯했다.


(성냥 던지는 소녀 - 14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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