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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법을 뜯어고치라.

성냥 던지는 소녀 - 15화

by rainon 김승진

버튼을 누르고 성냥갑을 던진다. 제로.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아직 공기 덩어리인 소녀는 맨 뒤 구석에 앉아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뉴스 속보입니다. 연쇄 빌딩 폭파범의 세 번째 예고 메일이 좀 전에 도착했습니다. 앞서 두 번의 건물 폭파 때는 24시간 전에 예고를 했었는데요, 이번에는 12시간입니다. 테러범의 목표물, 이번에는 OO은행 본점입니다. 시간이 얼마 없는 데다가, 폭파가 예고된 건물이 은행 본점이라는 점에서 지금 아주 긴박한 상황입니다. 현재 군과 경찰은...”


소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돌멩이가 알려준 곡. Alan Walker의 On my way.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구하기 시작할 거야. 정조준하고 쏴 버리는 거야. 지금 나는 아주 맑은 정신이야. 나 이외에 그 누구도 날 지킬 수 없어. 난 지금 내 길을 가는 거지. 핏빛 달이 떠오르고 있어. 내 두 눈에서는 불꽃이 솟구치지.>


집 화장실로 돌아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소녀가 거실 TV를 켰다. 바로 전날 20층 빌딩 폭파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던져진 또 다른 테러 예고에 온 나라가 패닉에 빠져 있었다. 화면 좌측 상단의 카운트다운 시계는 10:55:17, 10:55:16, 10:55:15. 폭발물 탐지를 위해 군경이 은행 본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픽 웃었다. 성냥갑 폭탄은 계속 투명하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폭탄은 이제 10시간 55분 후에 빌딩 외벽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것이다. 군과 경찰이 은행 건물을 샅샅이 뒤지는 헛수고를 하는 사이, 가루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물건들이 쉬지 않고 빌딩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기분이 상쾌했다. 이 도시의 모든 콧대 높은 빌딩들의 운명이 내 손안에 들어있다. 전부 다 날려버릴 수도 있어. 이제는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야. 그래 이 더러운 세상을 세탁기에 넣는 거다. 악취가 진동하는 모든 더러운 부(富)의 탑들이 주저앉는 날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야.


블랙 맨의 세 번째 폭파 예고 메일이 자막에 등장했다. <정확히 12시간 후인 밤 10시에, 첨부한 약도에 위치한 빌딩이 폭파된다. 이번에도 역시 빌딩 외벽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것이 가루가 될 것이다. 이 도시의 모든 빌딩들이 연쇄적으로 폭파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이것뿐이다. 배때기에 비계 낀 금배지들은 잘 들어라. 세법을 전부 고쳐라. 첫째, 전 과세표준 구간의 상속세율을 90%로 올릴 것. 둘째,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을 기반으로 벌어들이는 모든 불로소득에 매겨지는 세금의 세율을 90%로 할 것. 이상.>


은행 본점 빌딩 입구를 비추던 뉴스 특보 화면이 갑자기 멈췄다. 국무총리의 긴급 담화 발표. “정부는 이번 빌딩 연쇄 폭파 범죄를 국가전복 세력에 의한 반헌법적이고 비인도적인 테러행위로 규정합니다. 테러범의 요구사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 헌법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으로서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현재 범인을 잡기 위해 다각도로 추적과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곧 테러범을 검거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국민들께서는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일상에 충실하면서 피해 최소화 및 범인 조기 검거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테러 사건과 관련된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테러를 막고 범인을 검거하는데 결정적인 제보를 주시는 분께는 1억 원의...”


현상금이 배로 뛰었군. 그럼 5천만 원 더 버는 거야? 잔인한 만족의 미소가 소녀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절대 잡힐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절대 조심하자고 다짐하는 그때, 블랙 맨의 전화가 걸려왔다. “레스토랑에서 밤 9시에 퇴근하죠?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차에 타세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돌멩이를 한사코 뿌리치고 소녀는 퇴근길 걸음을 재촉했다. “오전 알바 자리 면접 보러 가야 해요. 내일 봐요.” 버스 정류장. 블랙 맨의 검은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 번호판. 또 바뀌어 있네? 첫날엔 없던 번호판은, 이후 소녀가 차에 탈 때마다 숫자가 달라지고 있었다. 소녀가 안전벨트를 맨 것을 확인하고 블랙 맨은 액셀을 밟았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내비게이션 화면. TV 뉴스 특보. 은행 본점 앞은 더욱 아수라장이었다. 24시간과 12시간의 차이는 크다. 국내 자산규모 서열 2위 은행 본점 내부의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켰지만, 중요한 자료와 설비, 집기들을 꺼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 군경과 취재진이 뒤엉킨 카오스 옆으로 두 패의 시위대들까지 가세했다. 블랙 맨의 요구사항이 명백히 드러난 오늘, 나라는 두 쪽으로 갈라졌다. 블랙 맨과 소녀는 어느새 영웅 또는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아닌 휴머니스트다! 빈부격차를 없애자! 금수저를 없애자!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나라!” “무슨 소리! 빨갱이다! 나라를 공산주의 세상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헌법 가치다!”


TV 화면 속 두 패의 시위대들이 든 피켓과 플래카드를 읽은 소녀의 마음속 혼잣말. ‘난 거창한 이념이나 법이나 그런 거는 잘 몰라. 다만 그동안 많이 서럽고 억울했어.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살아왔어. 이젠 나도 기분 좀 내려는 거야. 파란색 오로라도 보고 싶고 말이지. 세상을 세탁기에 넣는 거야. 깨끗이 하려는 거야. 난 바른 길을 걷고 있어.’


은행 본점 빌딩이 멀지 않게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공원 벤치. 캔맥주를 홀짝이는 블랙 맨과 소녀. “30초 남았어요.” 소녀는 심호흡을 했다. 마치 어릴 적,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화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마지막 TV 광고를 보는듯한 기분. 5, 4, 3, 2, 1. 제로. 그리고 꽝!!!


굉음이 잦아들면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위로 파란색 오로라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더 크고 높은 빌딩이라서 인가. 어제보다 몇 배나 선명하고 멋진 여름밤의 장관에 소녀의 두 눈과 입이 더 커졌다. 아... 아름답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모습. 예쁘다 정말.


“틈을 주지 말고 몰아붙입시다. 내일 오전 10시. 여기는 아마 잘 모를 거예요. 지도를 보내드리죠.” 블랙 맨이 건네는 성냥갑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소녀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다음날은 일요일. 오전 9시 55분. 증권사와 건설회사, 그리고 몇몇 중견회사들이 입주한 빌딩. 도시의 모든 대형 빌딩 입구에서는 경찰이 출입자를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지만, 투명한 공기 덩어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똑같은 방법. 이어폰에서는 크로아티안 랩소디(Croatian Rhapsody). 뚜벅뚜벅.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을 열고 카운트다운. 버튼을 누르고 성냥갑을 던진다. 제로. 미션을 완수한 소녀의 입가에 어제보다 더 잔인한 미소가 흐른다. 건물 밖으로 유유히 나오는 투명한 공기 덩어리. 휴. 긴장이 풀리려 하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 어? 음악이 한쪽에서만 들리고 있다! 오른쪽 귀의 무선 이어폰! 어딘가에 떨어뜨렸다. 소녀의 등골에 흐르는 땀 위로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성냥 던지는 소녀 - 16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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