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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와 달빛

성냥 던지는 소녀 - 14화

by rainon 김승진

파란색 오로라. 난생처음 만나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에 소녀의 숨이 멎는 듯했다. 원래 소녀가 파란색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집을 나간 엄마 노릇까지 하며 알코올 중독 아빠와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던 초등학생 시절, 잘 먹지 못해 또래보다 왜소하고 늘 남루한 차림이었던 소녀는 항상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잘 사는 집 막내딸로 공부도 잘했던,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녀를 괴롭히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던, 그래서 앞장서서 소녀를 못살게 굴던, 어느 비 오는 날 신발장 소녀의 낡은 운동화에 물을 부어놓고 히죽거리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아이가 즐겨 입었던 비싼 원피스의 파란색. 소녀에게는 가장 잔인한 색으로 각인되었었는데... 지금 내부가 폭삭 주저앉은 빌딩의 먼지구름 위로 펼쳐진 오로라의 파란색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배고픈 할아버지가 손에 쥐어주고 간 첫 성냥갑이 불타오르던 때의 그 파란빛, 결정적인 순간에 소녀의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뛰어든 그 파란빛과 똑같은 색깔의 오로라가 차츰 꺼져가고 있었다. 다시 보고 싶다. 반드시 저 오로라를 꼭 또 보고 싶다. 소녀는 다음번 빌딩이 터질 때에도 꼭 여기 와서 구경하리라 생각했다. 가만... 밤에 보면 더 예쁠 것 같은데. 오늘은 날이 워낙 흐려서 그나마 낮인데도 잘 보이기는 했지만...


“폭파 시각을 앞당겨야겠어요. 24시간은 너무 길어. 12시간으로 줄입시다. 밤 10시에 폭파하는 걸로 하죠.” 마음을 읽은 건가? 블랙 맨의 말이 소녀는 반가우면서도 뜨끔했다. 문득 소녀는 블랙 맨이 무섭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부리는 마술들도 무서웠다. 성냥갑 하나로 빌딩을 통째로 부숴버리고, 소녀를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처음 만나던 날 파란색 구슬 빛 덩어리를 허공에 띄워 소녀를 불러내고... 사람인 건가? 용기 내어 소녀가 물었다. “그런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내신 거죠? 아니 그보다는, 왜? 저를 고용하신 건가요? 이 일에 왜 저를 끌어들인 거죠?”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블랙 맨이 소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전화번호 알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고...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죠. 성소녀 씨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잠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블랙 맨이 말을 이었다. “축하해요. 성소녀 씨에게 드디어 현상금이 걸렸네요. 오늘은 5천만 원이지만, 이제 빌딩이 터질 때마다 더더욱 늘어날 거야. 그때마다 현상금 액수 그대로 입금해 드리겠어요. 약속했던 페이와는 별도로. 일종의 인센티브죠.” “네???”


“받아요.” 블랙 맨이 성냥갑을 건넸다. “내일 오전 10시. 방법은 똑같아요. 이번에는 파장이 좀 더 클 겁니다. OO은행 본점.” 화들짝 놀란 소녀가 되물었다. “은행... 을요?” “이제 강도를 점점 더 높여갈 거예요. 걱정 말아요. 은행 본점 날린다고 사람들 계좌에 든 돈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원장은 다 이중삼중으로 백업되어 있어요. 물론 복구하려면 진땀 좀 흘리겠지만. 그 은행에 계좌 있나요? 걱정된다면 통장 정리해서 꼭 잘 가지고 있어요.”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TV를 켰다. 도시가, 아니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었다. 얼굴 없는 수배전단. 폭파범에게 붙은 현상금은 정말 5천만 원이었다. 그리고 인터넷 뱅킹 앱을 열어보니 정말 5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성소녀 님이 성소녀 님에게 5천만 원을 이체하셨습니다.’ 생전 구경도 못해 봤던 엄청난 액수를 소녀는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레스토랑 일을 그만두고 대학 입시 준비를 해볼까? 아냐... 일은 당분간 계속 하자.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 의심받을지도 몰라.


출근해서 보니, 레스토랑 점장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아하! 너도 근처 어디에 건물 하나 갖고 있다 했었지? 잠 안 오겠네. 너도. 풉.’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자 뒤이어 출근한 돌멩이가 소녀를 보고 반가워했다. “일찍 왔네요? 점심은 먹었어요?” 소녀가 미소로 답했다. 파란색 오로라를 구경한 후로, 소녀의 마음은 내내 즐거웠다. 평생 만져보지 못한 5천만 원이 통장에 들어오자 마음은 든든하기도 했다. 콧노래를 부르려다 소녀는 참기로 했다.


밤 9시 퇴근. 근처 공원에서 밤 산책을 하자는 돌멩이의 제안에 소녀는 따라나섰다. 초저녁에 요란히 지나간 소나기가 한낮의 열기를 식힌 덕에, 공원의 밤은 아주 덥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앞으로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머니를 보던 한돌이 소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기억나요? 전에 우리 처음 밥 먹던 날, 소녀 씨가 그랬었잖아요? 소녀 씨는 할머니는 되지 않을 거라고.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왜? 오래 살기 싫은 이유가 뭐예요?”


“사는 게 힘들었으니까... 나에게 미래라는 것은 언제나 하기 싫고 어려운 숙제 같은 거였어요. 아픈 술쟁이 아빠 대신 여기저기 메뚜기처럼 돌아다니며 알바하면서, 월세 걱정, 밥 걱정을 달고 사는 게 지겨웠어요. 밤에 이부자리에 누워서는 그냥 이대로 잠자다가 고통 없이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으니까. 내가 남자를 만나 결혼이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도 가난하지 말라는 법은 없고. 아니, 가난한 엄마한테서 태어나면 그 아이도 가난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텐데... 먹고살기 힘든 세상. 죄 없는 아이한테 물려주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난 결혼도 안 하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냥... 이렇게 살다가, 버틸 때까지만 버티다가 조용히 없어지는 게 내 삶의 목표였거든요.”


“지금 말하는 게 다 과거형이네? 지금은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돌멩이의 질문을 듣고 소녀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지난 1주일 사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평생 겪었던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복잡하고 큰일들이 한꺼번에 단조롭던 소녀의 일상으로 쳐들어왔다. 믿어지지 않는 일들, 투명인간이 되고, 성냥갑을 던져서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테러범이 되다니... 그리고 오늘 통장에는 5천만 원이 입금되고...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이 남자.


“지금은... 모르겠어요. 잘...” 왠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운 소녀의 손을 돌멩이가 살며시 잡았다. 처음 잡아보는 남자의 손. 돌멩이의 손은 따뜻했다. 밤의 공원. 낮에는 잔뜩 흐렸던 하늘, 지금은 맑구나. 달이 참 예쁘네... 소녀의 마음 안으로 달빛이 환하게 차올랐다.


다음날 오전 9시 55분. 국내 자산규모 서열 2위 은행 본점 중앙현관 회전문으로 투명한 공기 덩어리가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기 덩어리의 귀 이어폰에서는 크로아티안 랩소디(Croatian Rhapsody)가 흐르고 있었다. 뚜벅뚜벅.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을 연다. 성냥갑 폭탄을 꺼낸다. 싸구려 전자시계의 숫자를 보며 정각 오전 10시를 향해 카운트다운. 6, 5, 4, 3, 2, 1.


버튼을 누르고 성냥갑을 던진다. 제로.


Maksim Mrvica - Croatian Rhapsody

https://youtu.be/3CdKrA3viNw


(성냥 던지는 소녀 - 15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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