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이후로 온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소녀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살포시 잠겨 드는 단잠...
깨어난 소녀는 돌멩이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 있는 일. 소녀는 당황했다. 눈은 떴지만, 몸을 일으키기가 쑥스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소녀는 그대로 돌멩이에게 기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어색한 기분이 차츰 가시고, 소녀는 편안함을 느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본 적? 기억이 없다. 기대고 싶은 날들은 새털처럼 많았지만, 편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좋은 향기. 그동안 잘 맡지 못했던, 항상 담배 냄새에 가려졌던 한돌의 향수 냄새가 향긋했다. 한돌과 처음 얘기를 나눴던 그날의 레스토랑, 부장검사 따님의 막말 속 삿대질에서 풍기던 그 여자의 향수는 왠지 모르게 칼날의 냄새가 났었다. 고급스럽고 비싼 향수였지만 상대를 밟아 짓누르는 것 같은 차갑고 사나운 향기였지. 한돌의 냄새는 그와는 달랐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분 좋은 향기를 더 느끼고 싶어서 소녀는 계속 자는 척,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르르 또 잠이 들었다.
영화관 안이 밝아지는 것을 눈꺼풀 위로 소녀는 느꼈다. 이런... 결국 2시간 내내 잤구나. 소녀는 한돌에게 기댔던 몸을 화들짝 일으켰다. “잘 잤어요? 많이 고단했나 봐.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나을 뻔했는데... 영화 보자고 해서 미안하네요.” “아녜요. 괜찮아요.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었어요. 제가 미안하죠. 돈 아깝게... 영화도 못 보고.”
오후 여섯 시. 태양의 절정이 한참 지난 시간임에도 도심의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집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돌멩이의 표정은 진심 근심이 어린 듯했다. “괜찮아요. 영화 못 본 대신에 푹 잤는걸. 가요. 저녁 먹어요. 제가 살게요. 뭐 드실래요? 순댓국?” 소녀가 씩 웃었다. 한돌도 웃었다. 이심전심. 둘은 시장 골목 그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오늘 순댓국집 이모는 트로트 경연 재방송이 아닌 드라마 재방송에 푹 빠져 있었다.
원래 소녀도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돌멩이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 두 번의 식사 때보다도 더욱 얌전히 둘은 각각 국밥 한 그릇과 소주 1병을 비웠다. 다만, 40분 남짓 각자 허기를 채우는 그 사이에 우연처럼 시선이 마주친 3번. 처음 2번은 둘의 눈빛이 0.1초 만나다 동시에 허공을 향했다. 세 번째. 소녀도 한돌도 서로의 눈빛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남자는 여자의 두 눈을, 여자는 남자의 두 눈을. ‘이 남자, 나를 정성껏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이 남자도 알고 있다. 너도 날 마음으로 보는 걸까.’ 처음 느끼는 설렘이 소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돌멩이가 말했다. “2차 갈래요? 분위기 깔끔하고 음악 좋은 곳인데...” “좋아요. 저는 이 동네 잘 몰라요. 편하신 데로 가요.”
순댓국집 미닫이문을 닫고 나오던 그때, 돌멩이가 구두끈을 고쳐 매려 잠깐 허리를 숙인 사이였다. 소녀는 누군가의 얼굴을 가린 스마트폰 하나가 자신들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찰칵!이었다. 소녀와 돌멩이가 나란히 가게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을 순식간에 촬영한 남자는 부리나케 인파 속으로 숨어버렸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도촬 맨. 구두끈을 다 손질하고 몸을 일으킨 돌멩이에게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잘 못 본 것일 수도. 너무도 순식간이었기에 소녀는 그놈이 자신들 둘을 몰래 찍은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소녀는 돌멩이를 따라 다시 도심으로 향했다.
둘은 아까 영화관으로 오르던 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섰다. 돌멩이의 단골 술집은 영화관과 같은 빌딩 3층에 있었다. <BLUE MOON> 파란 조명 간판 아래 파란색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바 내부는 온통 파란색이었다. ‘좀 전의 순댓국집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인데...’ 익숙한 듯 돌멩이는 바 구석에 앉았다. ‘비싼 데 같아.’ 살짝 주눅이 든 마음을 태연하게 덮으며 소녀도 바 옆자리에 앉았다. 반가운 표정으로 남자 바텐더가 한돌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형. 얼굴 까먹겠어.” 그때, 대여섯 자리 옆 저쪽에서 퉁명스러운 비아냥이 날아왔다. “이게 누구야? 햐. 너네... 알바 커플? 서빙 남녀? 여기서 또 만나네? 근데 여기 너네 월급에는 쫌 많이 비싼데? 적금 깨서 온 거니?”
지난 일요일 레스토랑, 오후 2시 5분의 그녀, 아니 그년이었다. 갑자기 소녀 머릿속으로 뛰어든 파란 빛줄기 때문에 주문을 2번이나 듣지 못했던, 그래서 소녀를 ‘거지 같은 년’이라고 부르며 쌍욕을 퍼붓던 그 부장검사 딸내미였다. 돌멩이의 고개가 천천히 그녀로 향했다.
“너 입 더러운 거, 너도 잘 알지? 가서 치카치카 좀 하고 와라! 냄새난다. 냄새 나.” 검사님의 공주님 목소리가 더 표독스러워졌다. “야! 나가 이 새끼들아! 여기 우리 엄마 빌딩이야!” 돌멩이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냥 개가 짖는다 치고, 신경 쓰지 말아요.”
소녀가 막말 진상녀를 노려보는 동안, 바텐더가 황급히 부장검사 딸이자 빌딩 주인 딸에게 달려갔다. “누나! 진정해. 왜 그래? 저 형 알아?” “야! 여기 아주 똥물 다 됐다! 응? 손님 가려서 안 받을래?” “뭔 소리야? 저 형 아멕스 블랙카드야.” “뭐?” “아멕스 블랙! 1년에 카드 2억 5천 긁는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그 카드 몰라?” 잠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던 진상녀가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며칠 전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보았던 돌멩이가 떠올랐다.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가던 돌멩이. 마음에 피어나려던 호감의 꽃망울에 어색한 거리감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자리로 돌아온 돌멩이가 바텐더를 불렀다. “전에 마시던 거 남았지? 그거 줘.” 30년 산 위스키. 소녀는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입안에 불을 지르고 식도를 태우며 내려가는 지독한 알싸함의 뒷맛은 뜻밖에도 향기롭고 은은했다. 2차 첫 잔에 소녀는 스스로가 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몽롱한 기분으로, 바 너머 진열장에 놓인 이름 모를 양주병들을 비추는 유리 찬장의 파란 조명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시끄럽던 그 전 음악이 잦아들고 잔잔한 피아노 반주 위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 좋은데? 이 곡 뭐지? “이 노래 제목 혹시 아나요?” 돌멩이가 스트레이트 위스키잔을 내려놓으며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