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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과 바꾼 목숨들

성냥 던지는 소녀 - 16화

by rainon 김승진

버튼을 누르고 성냥갑을 던진다. 제로. 미션을 완수한 소녀의 입가에 어제보다 더 잔인한 미소가 흐른다. 건물 밖으로 유유히 나오는 투명한 공기 덩어리. 휴. 긴장이 풀리려 하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 어? 음악이 한쪽에서만 들리고 있다! 오른쪽 귀의 무선 이어폰! 어딘가에 떨어뜨렸다. 소녀의 등골에 흐르는 땀 위로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일단 침착하자. 소녀는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빌딩 입구로 다시 향하며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갔어도 그대로 투명한 상태라면, 여전히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없을 거야. 하지만... 걸치고 있는 옷과 소지품이 소녀의 몸에서 분리되었을 때 투명 상태가 유지되는지 여부를 블랙 맨은 말해 주지 않았다. 소녀의 마음은 초조했다. 제발...


빌딩 중앙 현관에 이르도록 무선 이어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무장한 군인과 경찰들이 빌딩 앞으로 잔뜩 몰리기 시작했다. 구급차의 사이렌이 들리고 방송사 취재 차량들이 빌딩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블랙 맨의 예고 메일이 날아갔구나. 침착하자. 침착하자. 소녀는 중앙 출입문을 통과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제발 화장실에서 떨어뜨렸기를...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면 잽싸게 변기에 버리고 물만 내리면 그만. 단 몇 초 사이에 온갖 경우의 수를 가정해 본 소녀의 바람은 그러나...


빌딩 1층 로비. ‘과학 수사’가 쓰인 조끼를 입은 두 남자가 뭔가를 들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제길. 이어폰이다. 소녀의 것. “이게 갑자기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고?” “네.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누가 지나간 것도 아닌데 그냥 공중에서 탁 떨어졌어요.” “무선 이어폰이잖아?...... 테러범 목표물... 이 건물 맞지?” “네. 좀 전에 메일이 왔답니다.” “폭발물 감식 의뢰해. 지문 채취도 하고.” 무선 이어폰은 하얀 비닐장갑의 손에서 조그만 흰색 상자로 옮겨지고, 상자의 뚜껑이 닫혔다. 놓쳤다. 소녀의 눈앞이 캄캄했다.


1층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소녀는 청소도구함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게 된 성냥갑 폭탄을 회수할 방법은 없었다. 소녀는 블랙 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어폰을, 이어폰을 떨어뜨렸어요. 경찰이 가져갔어요. 지문 감식... 할 건가 봐요.” 잠시 침묵하던 블랙 맨이 말했다. “지금 어디죠?” “1층 여자 화장실. 성냥갑도 보이지가 않아요. 휘젓고 더듬어도 잡히지 않고.” “이어폰 아직 빌딩 안에 있나요?” “잠시 만요.” 소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로비로 나왔다. “아직 상자가 저기 책상 위에 있어요. 저기 들어 있어요. 아! 경찰이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해요.” “빨리! 빌딩 밖으로 나와요! 지금 당장 어서!”


소녀가 정신없이 뛰었다. 현관 통유리를 그대로 통과한 소녀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지금, 지금 밖으로 나왔어요.” 소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꽝! 귀가 터져나가는 굉음에 소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땅이 흔들렸다. 형언할 수 없는 폭발과 진동에 빌딩 주변 군인과 경찰과 기자와 행인들 모두가 보도블록 위에 자빠져 나뒹굴었다. 빌딩 중앙의 회전문 틈으로 콘크리트인지 시멘트인지 회색 가루들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귀도 눈도 뜰 수가 없는 지옥. 일단 벗어나야 해. 투명한 공기 덩어리 소녀는 보도블록 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 빌딩에서 멀어졌다.


집. 화장실. 거울 앞. 땀과 콘크리트 먼지로 뒤범벅이 된 소녀. 눈은 초점을 잃었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온몸이 덜덜 떨렸다. 털썩. 욕조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게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레스토랑 출근길. 버스 승객들은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간혹 과속 방지턱을 넘으며 덜컹거리는 엔진 소음 속으로 라디오 뉴스특보 앵커의 목소리가 급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 정확한 희생자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폭발 당시 건물 안에 몇 명이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됩니다. 일요일이라서 그나마 사무실 출근 직원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출입자 검문과 경비를 위해 먼저 들어가 있던 군경 인력과 빌딩 관리실 직원, 경비원, 청소노동자들 상당수가 이번 참사로 희생된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폭발의 강도와 내부 파괴 상태로 추정한 결과, 안타깝게도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긴급대책본부는 우선 붕괴된 건물 내부 잔해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생존자 구조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폭파 3분 전에 도착한 메일에서 테러범은 폭파 시점을 오늘 밤 10시로 예고했었는데요, 무슨 이유로 갑자기 폭파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곧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취재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일주일 중 가장 손님이 많아야 할 일요일 오후였지만, 레스토랑은 적막했다. 하루에 하나씩 빌딩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차츰 사람들은 외출을 꺼렸다. 게다가 오늘, 예고와는 다르게 갑자기 빌딩이 폭파되면서 사망자가 나오자 도시의 분위기는 더 흉흉해졌다. 점장도, 매니저도, 직원들도 모두 말이 없었다. 텅 빈 가게를 둘러보던 점장이 TV를 켰다.


“30분 전, 테러범이 다시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내용은요... 지금 자막으로 송출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발생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는 그 어떤 인명 피해도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어제 요구한 두 가지 사항. 상속재산과 불로소득에 대한 세율 90%가 달성될 때까지 이 도시의 빌딩들은 도미노처럼 하나씩 무너져 내릴 것이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와 국회가 우리의 요구대로 이행하는 것이 비극을 멈추는 빠른 길이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앞으로 1주일 동안은 추가 폭파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약속한다.>


소녀는 테라스로 나갔다. 손바닥을 펼쳤다. 내리 쏟아지는 한여름의 태양빛이 소녀 손가락의 지문을 찌르고 있었다. 이 지문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귀도 머릿속도 여전히 멍했다. 녹아버리고 싶어. 내가 얼음이라면 좋겠어. 햇빛에 녹아서 사라지고 싶어.


돌멩이가 소녀 옆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왜...” 고개 돌려 돌멩이를 본 소녀. 참았던, 아니 차마 터뜨리지 못한 울음이 돌멩이를 본 순간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나... 나 어떡해... 나... 이제...” 꺽꺽 통곡 속으로 소녀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깜짝 놀란 한돌이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소녀는 돌멩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성냥 던지는 소녀 - 17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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