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17화
참았던, 아니 차마 터뜨리지 못한 울음이 돌멩이를 본 순간 폭탄처럼 터져 나왔다. “나... 나 어떡해... 나... 이제...” 꺽꺽 통곡 속으로 소녀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깜짝 놀란 한돌이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소녀는 돌멩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소녀 씨. 나 좀 봐요. 응? 얘기를 해봐. 어서.” 소녀의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돌멩이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녀의 들썩이는 어깨 틈으로 새어 나오는 서러운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소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한돌이 말했다. “점장님이 오늘은 다들 그냥 퇴근하래요. 어차피 이 분위기에 손님도 없을 것 같다고. 구두쇠가 웬일로 오늘 일급은 다 일한 걸로 쳐준다나. 아까 주저앉은 건물에 점장님 아는 사람이 안에 있었나 봐요. 그래서 가게 열 기분도 아니라고.”
오후 4시 반. 간단히 뒷정리를 마치고 돌멩이와 소녀는 가게를 나섰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순댓국... 먹고 싶어요.” “그래. 잘 생각했어요. 실컷 울고 나면 뭐든 먹어야 해. 가요.”
오늘 순댓국집 이모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건, 트로트 경연 재방송도, 드라마 재방송도 아니었다. 혀를 끌끌 차며 생방송 뉴스 특보에 눈을 빼앗긴 주인 여자가 잠깐 시선을 돌려 둘을 반겼다. “순댓국 둘에 소주 하나지?”
기본 반찬들과 소주를 테이블에 올리면서 주인 여자가 말했다. “아니 이게 정말 무슨 일 이래? 응? 하루에 한 개씩 빌딩이 무너지고... 아니 그 뭐냐. 테러리스트? 갸는 부자들 세금 많이 내라고 저 지랄을 하는 거람서? 근데 이게 뭐냐고? 응? 오늘 죽어나간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라구. 다들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응? 거기 청소하고 경비 서는 노인네들이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여기 가끔 오는 할아버지 한 분도 오늘 거기서 죽었다더라고. 세상에. 응? 군인이나 경찰은 또 무슨 죄냐고? 정 미우면 응? 부자들을 죽이든 살리든 할 것이지. 부자들한테 세금 더 걷는 건 백번 찬성이야. 근데 이건 아니야.”
얼어붙은 소녀의 심장을 주인 여자의 말이 쇠망치가 되어 내려치고 있었다. 이제는 소녀의 소울 푸드(soul food)가 된 순댓국 한 그릇으로 기운을 챙기러 온 식당에 앉자마자, 소녀의 영혼이 회초리를 맞고 있었다. 구구절절 토씨 하나까지 다 옳은 주인 여자의 말에 소녀도 돌멩이도 별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돌멩이가 소녀의 잔을 채웠다.
“무슨 일 때문인지... 궁금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죠. 속이 상하다 못해 찢어지는 날. 그런 날에는 그냥 아무 말도 하기가 싫잖아요.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셔요. 내가... 소녀 씨 곁에 있을게요. 속 버리니까, 밥도 같이 먹으면서 마셔요.”
숟가락을 들다가 소녀의 눈이 또 뜨거워졌다. ‘너... 넌 왜 이렇게 내게 따뜻한 거냐. 오늘 돌멩이 네가 없었다면... 난 정말 터져 죽고 말았을 거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한돌 씨.’
1시간 20분 뒤, 순댓국집을 나올 때 소녀는 이미 취해 있었다. “오늘은 그만 마셔요. 집에 데려다줄게.” “아냐. 나 괜찮아. 돌멩 씨. 거기 가자. 거기 왜 돌멩 씨가 까만 카드 긁는다는 파란 술집. 전에 갔던 거기. 응? 나 그 비싼 양주랑 육포가 먹고 싶단 말야.”
바 <BLUE MOON>에도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민규라는 이름의 돌멩이 후배도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뉴스 특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에 마시던 거는 그냥 놔두고. 새로 하나 가져와. 육포 좀 많이 주고. 그리고 다시 얘기하는데, 내가 아멕스 블랙카드 쓴다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라. 제발. 너 또 그러면 나 여기 안 온다.” “에이. 형. 진짜 이제 말 안 해 아무한테도.” “토미 페이지, 어 숄더 투 크라이 온. 틀어줘. 손님도 없으니까 음악은 잔잔한 걸로 계속.”
지난번 왔을 적에 소녀가 곡명을 물어봤던 노래. ‘A shoulder to cry on’이 파란색 조명으로 가득 찬 바 공간을 어루만지듯 흘렀다. 기억해 주는 돌멩이가 고마웠다. 빌딩 내부와 함께 가루가 되어버린 사람들... 몸도 마음도 송두리째 산산이 조각난 하루. 맨 정신으로는 숨도 쉬기 힘든 오늘, 그래도 돌멩이가 옆에서 지켜준다는 느낌이 소녀에게는 한 가닥 지푸라기였다.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 까지 세다가 소녀는 쓰러져 잠이 들었다. 돌멩이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부르는 소리가 아득한 저 편으로 메아리치면서 소녀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소녀의 방 이부자리 위였다. 드문드문 기억이 녹아버린 빈자리는 숙취의 두통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어떻게 집에 온 거지? 돌멩이가 데려다준 것 같은데, 집을 어떻게 찾은 거야? 스마트폰을 열자, 문자 메시지 2개가 와 있었다. “정류장 앞 분식집 아주머니가 다행히 소녀 씨 집을 알더라구요. 오전 푹 쉬고, 오후에 가게에서 봐요.” 또 다른 메시지는 블랙 맨의 것이었다. “내일 오전 10시. 놀이터 옆 슈퍼 앞.” 시계를 보았다. 8시 55분. 서둘러 아빠의 아침 밥상을 차리고 소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아래에서 물을 맞으며 소녀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제의 기억을 어쩔 수 없이 불러냈다. 샤워기가 토해내는 물방울이 서서히 취기를 걷어내자, 잠깐 알코올로 덮었던 공포와 트라우마가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다시 숨이 막혀왔다. 몸을 웅크리고 욕조에 엎드린 채로 소녀는 숨을 쉬려 노력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난 그저 이어폰을 떨어뜨렸던 것뿐이야. 성냥갑을 터뜨린 건 그놈이야. 내가 아니야. 고작 내 지문이 묻은 이어폰 하나 없애겠다고 사람들을 죽인 건 그놈이야. 내가 아니야. 죽고 싶은 자책과 후회 속에서도 하지만 소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막혀 오는 숨을 뚫어내기 위해 소녀는 안간힘을 쓰며 마음속 외침을 반복했다.
오전 10시. 놀이터 옆 슈퍼 앞. 블랙 맨의 검은 승용차 번호판은 오늘도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이 개자식의 정체가 과연 뭐야? 사람이야, 귀신이야? 블랙 맨을 만난 지 이제 꼭 일주일째. 소녀는 처음으로 그를 만난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5천만 원을 돌려주고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이건 아니다. 빌딩이 터질 때의 쾌감, 붕괴의 잔해들 위로 피어오르는 파란색 오로라의 황홀함, 멸시와 천대 속에서 서럽던 지난날에 대한 후련한 화풀이. 이제 모두 그만두자. 그냥 살던 모습으로 살자.
소녀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