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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 던지는 소녀 - 18화

by rainon 김승진

5천만 원을 돌려주고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이건 아니다. 빌딩이 터질 때의 쾌감, 붕괴의 잔해들 위로 피어오르는 파란색 오로라의 황홀함, 멸시와 천대 속에서 서럽던 지난날에 대한 후련한 화풀이. 이제 모두 그만두자. 그냥 살던 모습으로 살자. 소녀는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블랙 맨이 액셀을 밟았다. 파란색 오로라 쇼를 관람하던 산 중턱 공원을 향해 차는 내달렸다. 소녀는 내비게이션 TV를 켰다.


“... 어제 빌딩 폭파 테러로 인한 희생자는 총 126명으로 잠정 파악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일요일이어서 희생자가 더 늘지는 않았습니다만, 유족들과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출입자 검문과 경비를 위해 빌딩 내부에 있던 군인과 경찰, 건물 관리실 근무 인원, 그리고 휴일에도 출근한 경비원과 청소노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안타깝게도 사실상 생존자는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유해 수습 작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건물 외벽은 그대로인 채, 내부 전체가 폭파로 주저앉은 상황이어서 작업이 매우 어렵고 더딘 상황입니다. 이는 이전에 무너진 두 빌딩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철거와 복구를 위해서는 빌딩 외벽을 우선 제거해야...” 소녀가 채널을 돌렸다.


“... 수사 당국은 어제 붕괴된 빌딩 인근 CCTV에 대한 정밀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단서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폭파에 쓰인 폭발물이 어떤 종류인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소식입니다.” 소녀는 TV를 껐다.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왜? 폭탄을 터뜨린 거죠? 사람은 절대 죽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요.” 블랙 맨이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소녀 씨가 떨어뜨린 이어폰에 묻은 지문이 잡히는 순간부터 이 프로젝트는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해요. 투명인간 상태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CCTV에는 흔적이 남지 않았지만, 통신 감청이 시작될 테고 소녀 씨 집 주변에는 경찰들이 잠복을 시작할 겁니다. 우리가 만나서 성냥갑을 주고받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무엇보다도 바로 엊그제 소녀 씨의 은행 계좌에 5천만 원이라는 큰돈이 입금된 것.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살인은... 내가 저지른 겁니다. 소녀 씨는 이어폰을 떨어뜨렸을 뿐. 폭탄은 내가 터뜨린 겁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요.”


“어쨌거나... 이제 저는 그만 하겠어요. 돈은 돌려드릴게요. 바로 눈앞에서 1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저... 더는 못하겠어요.”


대답 대신 블랙 맨은 소녀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받은 사진을 들여다본 소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오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건... 당신이었구나. 이... 이게... 지금 협박... 하는 건가요?”


지난 목요일, 돌멩이와 영화를 본 날이었다. 밥을 먹고 순댓국집을 나설 때 누군가가 소녀와 돌멩이를 몰래 촬영하고 도망갔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진 속 돌멩이는 구두끈을 고쳐 매느라 찍히는 것을 몰랐지만, 소녀는 동그란 눈으로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어쩌자는 건데???”


“나도 이제부터는 반말로 얘기할게. 짧게 말하지. 네 애인이 제 명까지 살기를 바란다면, 시키는 대로 계속하는 게 좋을 거야.”


소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요. 그냥 나 놓아줘요. 한돌 씨도 건드리지 마요.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그냥 니가 성냥갑 던지고 폭탄 터뜨리면 되잖아. 왜 나냐구? 이렇게 빌게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블랙 맨이 차갑게 웃었다. “말했잖아. 이게 네 운명이라고. 피할 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네 숙명.” 블랙 맨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걱정하지 마. 네가 이어폰을 떨구는 그런 멍청한 실수만 다시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아. 약속한 대로 현상금만큼 큰돈도 벌 수 있어. 앞으로 빌딩 7개만 더 날리면 이 미션은 끝나. 상속세율 90%? 나도 바보는 아니야. 이 나라의 모든 빌딩들이 무너진다 해도, 그렇게는 안 돼. 다만 이 냄새나게 더러운 추악한 자본주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는 거야. 빌딩 10개를 날리면, 이 사회의 경제구조가 근본적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각성과 반성은 생길 거야. 내... 아니 우리 목적은 그거야.”


블랙 맨이 고개를 숙여 땅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며칠 쉬도록 해. 일요일 밤 11시에 놀이터로 나와. 가자. 차에 타.”


집. 화장실. 거울 앞. 소녀가 소녀를 바라본다. 덫에 걸렸다. 죽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덫. 내가 죽어야 끝날까. 내가 없어지면 굳이 저놈이 돌멩이를 죽일 이유는 없어지잖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놈 말대로라면... 내가 없다면 성냥갑 폭탄으로 빌딩을 날리는 짓도 못할 것 아냐? 하지만 내가 죽으면 아빠는...


주방으로 나와 소녀는 찌개를 끓였다. 요즘 들어 부쩍 아빠는 더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덜 먹는 것 같았다. 냉장고의 소주병이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가난한 점심상 앞에 부녀가 앉았다. “이따 밤에 퇴근하면서 고기 사 올게. 내일 아침에 구워 줄 테니까, 오늘 저녁은 찌개 데워서 드세요.” 말없이 찌개를 한 술 뜬 아빠는 물 대신 소주가 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빠... 나 없으면 누가 술을 사주고 찌개를 끓여줄까. 내가 죽으면 아빠도 오래는 못 버틸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녀의 마음은 찢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떡해야 하나... 모래알 같은 밥알을 씹고 있는데, 전화기가 진동했다.


돌멩이였다.


(성냥 던지는 소녀 - 19화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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