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19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녀의 마음은 찢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떡해야 하나... 모래알 같은 밥알을 씹고 있는데, 전화기가 진동했다. 돌멩이였다.
“점심 먹었어요?” “지금 먹는 중인데...” “아... 내가 좀 일찍 올 걸. 그럼 맛있게 다 먹고 나서 준비하고 나와요.” “네? 뭘 준비하라는?” “매니저 형 문자 못 받았어요? 오늘까지 레스토랑 쉰다고. 오늘 출근 안 해도 된대요. 천천히 먹고 나와요. 바다 보러 가요. 우리.”
가난한 옷장 앞에서 소녀는 한참을 고민했다. 바다 보러 가자는데... 몇 벌 되지도 않는 외출복들을 놓고 뭘 입어야 하나...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간단한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소녀는 환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돌멩이의 외제 스포츠카 조수석은 블랙 맨의 검정 세단 조수석보다 훨씬 널찍하고 쾌적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달랐다. “맞다. 한돌 씨 점심은요?” “기다리면서 거기 정류장 앞 분식집에서 라면 하나 먹었어요. 주인 아줌마 친절하고 재밌던데요? 말했나? 어젯밤에 그 아줌마가 소녀 씨 집 알려줬거든.” 이 남자 참 넉살도 좋다. 어제 처음 봤을 분식집 아줌마랑 그새 친해지다니... 소녀는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여름 공기의 상큼한 향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몇 시간 전 블랙 맨의 협박에 털썩 주저앉았던 심정, 꼼짝 못 할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암담함을 잠시라도 씻어내는 여름 바람이 소녀의 볼과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렇게 즐거운 드라이브라니... 돌멩이와 함께 하는 이 경쾌한 질주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소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돌멩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는 사람... 노래 가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현실에 정말로 있구나.
휴가철이었지만 돌멩이의 스포츠카가 멈춘 해변엔 인적이 드물었다. “여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데라서. 그래서 이리로 온 거예요.” 낡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소녀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철썩대는 파도 소리가 갯바람을 타고 날아오기 시작하는 저기 수평선 끝, 하늘과 맞닿은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평생의 첫 남자 친구. 생전 처음으로 남자와 함께 온 여행. 처음 맛보는 마음 가득한 기쁨은, 그러나 그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있었다. 쇠사슬 끝에 매달린 폭탄 같은 블랙 맨의 협박이 소녀의 마음을 계속 짓누르며 기쁨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소녀 옆으로 돌멩이가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름 오후의 햇살 아래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다 끝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소녀는 한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깐 뒤, 돌멩이가 몸을 돌려 소녀를 끌어안았다. 마주 바라보는 두 눈. 남자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로 향하고... 소녀는 눈을 감았다.
저녁 무렵, 한 쌍의 연인을 태운 스포츠카는 도시로 돌아왔다. “저녁 뭐 먹을까요? 뭐 먹고 싶어요?” “아! 저녁 먹기 전에 마트 먼저 들르면 안 될까요? 장 좀 봐야 해서...”
돌멩이가 쇼핑 카트를 자청해서 밀었다. 누군가와 그것도 남자와 마트를 함께 온 것도 소녀는 처음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해 보는 게 정말 많구나... 부끄러웠지만 따스하고 촉촉했던 첫 키스의 여운을 입술에서 다시 느끼면서 소녀는, 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이 마음의 여유가 어디서 온 걸까? 생각했다. 아... 통장에 든 5천만 원... 가격표의 숫자를 더해가면서 늘 가장 싼 물건만 고르느라 신경이 곤두섰던 예전과는 다른 편안함은 성냥갑을 던진 대가였구나. 갈팡질팡 오른쪽과 왼쪽으로 시소를 타는 소녀 마음속 양팔저울. 콧노래를 부르며 쇼핑 카트를 밀고 있는 돌멩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나... 너도, 나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을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 이리도 많은 하루라니... 감히 가격표를 본 적도 없던 한우 꽃등심을 처음으로 소녀가 카트에 담았다. 이것저것 장을 보고 계산대를 향하려는데, 돌멩이가 소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내가 신발 사주고 싶어요.”
몇 년을 신은 소녀의 낡고 더러운 운동화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지던 지난 일요일이 생각났다. 여유가 생기면 가장 먼저 사겠노라 마음먹었던 새 신발을 고르는 소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괜히 눈물이라도 흐를까 봐, 소녀는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돌멩이에게 톡 쏘아붙였다. “근데, 원래 연인끼리는 신발 사주는 거 아니라던데? 신고 도망간다고.” “풉. 나 어디 안 가요. 절대. 근데 지금 우리가 연인이 된 거라는 걸 소녀 씨가 인정한 거죠? 그렇죠? 그럼 오늘부터 1일이다. 우리.”
돌멩이와 함께 장 본 물건들을 반지하 월세방 현관 안으로 밀어 넣어두며, 소녀는 아빠의 안부를 살폈다. “나 저녁 먹고 들어올 거야. 약 꼭 드셔야 해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두 사람은 순댓국집 구석 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수저통을 열면서 돌멩이가 투덜거렸다. “어제도 먹었는데, 오늘도? 좀 더 맛있는 거 사준다는데도...” “난, 여기 순댓국이 제일 맛있다니깐. 질리지도 않고. 오늘은 여기서 먹고 싶어. 스테이크는 다음번에 먹으러 가요, 꼭.”
국밥 한 숟가락, 소주 한 잔이 둘의 뱃속을 뜨끈하게 채우는 동안, 소녀와 돌멩이의 눈빛은 수시로 마주쳤다. 이제는 서로의 눈빛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두 눈을, 여자는 남자의 두 눈을. ‘내가 너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넌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도 알고 있다.’
술을 마신 탓에, 돌멩이는 차를 근처 주차장에서 하루 재우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 손을 잡은 두 사람. 버스 안. 잡은 손 놓지 않는 두 사람. 소녀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 입구의 가로등이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둘에게 빛의 미소를 뿌려주고 있었다. “내일 가게에서 봐요.” “잘 가고, 잘 자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다 말고 돌멩이가 소녀를 안았다. 아까 오후 바닷가에서보다 더 길고 더 짙은 입맞춤. 소녀는 입술을 떼기 싫었다.
방으로 돌아온 소녀가 스마트폰을 열었다. 블랙 맨에게 보내는 메시지.
<처음 약속했던 대로, 계속 일을 하겠어요. 당신도 약속을 꼭 지키세요. 한돌 씨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세요.>
답장이 바로 왔다.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