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구석. 블랙 맨이 그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로 옆 그네에 소녀가 걸터앉았다. 탁, 탁. 꽁초 끝에 남은 불씨를 쳐내면서 블랙 맨이 입을 열었다.
“지난주, 좀 심하게 말했던 건 미안해요. 소녀 씨 애인 사진으로 협박했던 것도... 어쩔 수 없었어.” “약속만 지키세요. 다시는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게... 그리고... 한돌 씨... 제발 절대로 절대로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말아 줘요. 부탁이에요.”
“약속합니다. 이제 남은 일주일. 딱 7번만 성냥갑 폭탄을 던지기만 해요. 그러고 나서는... 소녀 씨가 나를 만날 일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받아요.”
소녀가 성냥갑을 받아 들자, 블랙 맨이 전화기를 꺼냈다.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 방법은 똑같아요. 빌딩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 장소 약도는 지금 메시지로 보냈어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투명인간 상태에서 입은 옷이나 가진 물건을 절대 몸에서 떨어뜨리면 안 됩니다.” 블랙 맨이 그네에서 일어섰다.
“소녀 씨가 성냥갑을 던지는 오전 10시 정각에 정확히 예고 메일이 언론사로 발송됩니다. 폭파 시각은 12시간 후인 밤 10시 정각. 내일 밤 9시에 레스토랑 앞으로 데리러...” “아뇨! 오지 마세요!” 소녀가 블랙 맨의 말을 끊었다. “오지 마세요. 나... 이제 더 이상 그 파란 오로라 안 볼 거야. 뉴스도 안 볼 거예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안 볼래요.”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앞으로 매일 밤 12시에 이 자리에서 만나는 걸로 합시다. 성냥갑과 목표물을 전해 줘야 하니까...”
블랙 맨의 검은 세단이 골목 저편 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소녀의 시선이 손에 쥔 성냥갑으로 떨어졌다. 이제 일주일. 딱 일곱 번이다. 일주일만 지나면... 난 저 시커먼 놈을 보지 않아도 된다. 이 우주선에서 내릴 수 있다. 일주일만 견디자. 침착하자.
소녀는 전화기를 꺼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이 다 끝날 때까지는 돌멩이와의 오전 데이트는 불가능하다. 매일 아침 소녀의 집으로 오르는 언덕 밑에 스포츠카를 세우고 기다리는 돌멩이에게 소녀가 전화를 걸었다. “아! 소녀 씨. 왜 아직 안 자고?” “내일 아침에 어딜 좀 가봐야 해서요. 오전에 만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오후에 레스토랑에서 봐요. 네. 잘 자요.”
월요일 아침. 집. 화장실. 거울 앞. 잠시 거울 속의 스스로를 노려보던 소녀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성냥갑은 모습이 변해 있었다. 플라스틱인지 쇳덩이인지 재질을 알 수 없는 딱 성냥갑만 한 크기의 파란색 직육면체 덩어리 한쪽 표면에 타원형 버튼. 심호흡 한 번. 소녀는 버튼을 눌렀다. 3초 간 진동 후, 성냥갑 폭탄부터 소녀의 손과 팔, 가슴이 물감 번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녀는 공기 덩어리가 되었다. 성냥갑 폭탄을 주머니에 넣고 소녀는 현관을 나섰다. 두 시간 후...
목표물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에 투명한 성냥갑 폭탄을 던진 공기 덩어리는 다시 집 화장실로 돌아와 소녀가 되었다. 오늘도 온몸은 땀범벅. 옷을 벗고 샤워기를 튼 소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성냥갑 말고, 오늘은 아무것도 떨어뜨리지 않았어. 아무도 다치지 않아. 그냥 빌딩만 무너져 내릴 거야. 블랙 맨의 말대로야. 이 더러운 빈익빈 부익부 세상에 경고를 던지는 것뿐이야.”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버스 안. 역시나 스피커에서는 라디오 뉴스 속보가 시끄러웠다. “... 테러범의 예고대로 1주일 만인 오늘 오전 10시에 또다시 건물 폭파를 예고하는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해당 건물 전체가 폐쇄된 가운데, 폭발물 탐지를 위해 군경이 투입된 상태입니다. 빌딩 안의 모든 인원을 긴급히 대피시키고 중요한 물자와 설비를 반출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장 연결합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바늘 같았다. 바늘은 소녀의 귀만이 아닌 온몸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녀는 유선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레스토랑. 아직 영업시간이 2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점장은 한숨을 쉬며 문을 닫자고 했다. 도심 빌딩 폭파 테러가 일주일 만에 예고된 오늘은 정말로 찾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어. 부자들 세금 올리기 전에, 중산층이랑 서민들 먼저 다 죽어나가게 생겼다고. 식당 하나 망하면 몇 명이 굶는지 아나 몰라? 저 테러범 개새끼는!” 오늘 점장에게 가게 그만둔다는 말을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소녀는 생각하며, 돌멩이와 함께 가게 문을 나섰다.
순댓국집. 그래도 여기 이 시장 골목의 단층 식당들은 폭파될 염려가 없으니 다행이구나... 생방송 뉴스 특보에 정신이 팔린 이모가 두 사람을 보고서 말했다. “순댓국 둘, 소주 하나지?” 소주잔을 먼저 채운 돌멩이가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며 소녀가 말을 꺼냈다.
“나... 내일부터 공부를 좀 시작하려구요.” “무슨 공부? 자격증?” “아니, 나 대학 가고 싶어서.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아... 그래요. 소녀 씨가 하고 싶으면 해 봐요. 난 사실 학교 다니다 중퇴했어요. 비싼 등록금만큼 그닥 얻는 게 없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마다 다른 거니까... 난 소녀 씨 결정 존중해요. 기왕 하는 것. 열심히 해봐요. 파이팅!” 둘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래서 말인데, 나 레스토랑 그만둘까 해요.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어.” 돌멩이가 잔을 내려놓으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만두는 건 찬성이에요. 근데... 돈... 은? 당장 생활비에 책값이나 학원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많지는 않지만 그동안 모아둔 걸로 한 1년은 버틸 수 있어요. 걱정 안 해줘도 괜찮아.” “소녀 씨... 오해는 하지 말구요. 혹시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도울” 소녀가 돌멩이의 말을 잘랐다. “그 말 할 줄 알았어.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 밥 먹고 공부할 돈 있어요.” 대답 대신 돌멩이는 따뜻한 눈빛으로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일부터 오전에는 동네 독서실에 있을 거예요. 레스토랑 그만두는 건 내일 말할 거고.”
사실 독서실에서 차분히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남은 6개의 성냥갑을 모두 던지고 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차마 성냥갑 폭탄을 던지러 다니느라 오전 데이트를 못한다고 돌멩이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가는 언덕 앞 가로등 아래. 짙고 긴 입맞춤 끝으로 돌멩이가 소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자주, 많이 볼 수는 없겠지만... 소녀 씨 공부, 내가 항상 응원할게!”
월화수목금토. 6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사이 소녀는 레스토랑 알바를 그만두었다. 영혼 없는 기계가 되는 편이 낫다. 뉴스도 보지 말자. 소녀는 기계처럼 밤 12시에 블랙 맨으로부터 건네받은 성냥갑을 다음날 오전 10시에 그가 지정한 빌딩 1층 여자 화장실 청소도구함에 던졌다. 하루에 하나씩 매일 밤 10시에 빌딩이 날아가는 동안,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이었지만, 소녀는 담담하게 이 성냥갑 던지는 아르바이트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결국 찾아온 토요일. 아홉 번째 성냥갑 폭탄이 터지고 2시간이 지난 자정, 놀이터 그네. 이제 열 번째, 드디어 마지막 성냥갑을 건네받는 소녀에게 블랙 맨이 말했다.
“소녀 씨가 자주 가본 곳이에요. <BLUE MOON>이 있는 그 빌딩. 마지막 타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