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22화
이제 열 번째, 드디어 마지막 성냥갑을 건네받는 소녀에게 블랙 맨이 말했다. “소녀 씨가 자주 가본 곳이에요. <BLUE MOON>이 있는 그 빌딩. 마지막 타깃입니다.”
잠깐, 소녀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BLUE MOON> 돌멩이의 단골 바. 이젠 소녀도 함께 즐겨 찾는 파란색 술집. 하필 왜? 돌멩이를 해치려는 건가? 아니지. 어차피 예고 메일이 날아갈 테고, 폭파를 앞두고 건물 전체는 폐쇄될 거니까... 누구도 다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돌멩이가 아끼는 공간, 소녀도 좋아하는 그 술집이 사라진다는 것은... “왜... 그 빌딩을 폭파시키려는 거죠? 이유라도?” “<BLUE MOON>이 목표가 아녜요. 단지 목표물 3층에 그 술집이 있다는 것뿐이지. 받아요.” 블랙 맨이 마지막 성냥갑을 건넸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빌딩 10개를 무너뜨려서 세상을 뒤집어 바꿀 수는 없어요. 그만큼... 인류의 역사만큼 긴 시간 동안 뿌리내린... 자본과 세습의 힘은 굳건하니까...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이죠. 자본의 본능, 세습의 본능... 자본을 새끼 치게 하고, 제 새끼한테 그걸 물려주려는 본능. 그걸 없애는 것은 불가능해요.” 블랙 맨이 담배를 물었다. 돌멩이와 같은 담배를 피우는구나. 그동안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던 블랙 맨의 담뱃갑 브랜드명이 오늘따라 소녀의 눈에 띄었다.
“공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은 무한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본질. 세상 모든 불평등과 부조리의 시작은 바로 거기죠. 한정된 땅덩어리는 소수가 독점할 수밖에 없고, 그 소수의 종족 번식과 천년만년 자자손손을 향한 내리사랑은 인간의 본능이고... 자본의 독점과 부의 영속적 세습을 향한 그들의 본능은... 말 그대로 본능이에요. 그 어떤 이성과 도덕보다도 강한... 피보다 더 진하고 잔인한 본능... 애초부터 상속재산과 불로소득에 90%의 세금을 매기는 것은 실현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어요. 다만... 조금이나마... 이 세상이 반성하고 각성하기를 바랐을 뿐.” 블랙 맨은 담배를 비벼 껐다.
“처음 우리가 만나던 날, 내가 했던 말 혹시 기억하나요?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세상의 계단을 흔들자. 반지하가 없으면, 1층이 없다면, 빌딩은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초고층 빌딩 꼭대기는 제 발바닥에게 항상 빚을 지고 있는데... 그들은 최소한의 고마움도 모른다는 것. 무엇이 빌딩 꼭대기 펜트하우스를 지탱해 주는지, 그들이 누리는 것들이 어떤 희생을 밟고 쌓아 올려진 것인지 너무 오랫동안 그들은 잊어버린 채 살고 있죠. 그걸 가르쳐 주려는 일종의 경고였어요. 이 모든 것은...”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놈이 그날 그랬었지. 가난이 죄인가? 더럽고 낡은 것이 죄인가? 주머니가 가볍다고 사람까지 가벼운 취급을 받는 근거가 대체 뭐지? 몸에 걸친 것이 비싸면 상대를 깔보고 짓밟아도 되는 면허라도 생기나? 이 모든 일이 시작된 3주 전이 떠올랐다. “거지 같은 년, 거지새끼, 거지 같은 년, 거지새끼, 거지, 거지, 거지...” 명품 공주와 편의점 사장의 비아냥과 천대가 다시 소녀의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작별합시다. 내일 오전 10시에 소녀 씨의 아르바이트가 끝납니다. 고마웠어요. 앞으로 부디 건승하시길...” 블랙 맨은 그네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승용차로 향했다. “잠깐만요!” 블랙 맨이 발을 멈추고 소녀를 돌아보았다. “왜? 왜? 저를... 고용한 거죠? 왜 내가 성냥갑 폭탄을 던져야 했던 거죠?”
“처음부터... 그리 되도록 정해진 운명이었던 겁니다. 그 이상으로는 설명이 어렵네요. 그럼 안녕히. 이제 우리가 만날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뭔가 망설이는 듯이 블랙 맨은 마지막 말을 천천히 머뭇거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블랙 맨의 차는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성냥갑을 서랍 속 깊이 넣어두고, 소녀는 창가를 넘어온 달빛을 쬐었다. 오늘따라 달빛은 파란색이었다. 처음 블랙 맨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때 소녀는 직감했었다. 뭔가의 흐름에 난 올라탔구나.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젠 내릴 수 없는 우주선에 이미 난 올라왔다. 도착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항해 도중에 이 우주선에서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겠구나... 그리고 이제 내일... 파란색 달빛 아래 바 <BLUE MOON>이 파란색 오로라 속, 가루가 되면서... 난 드디어 이 우주선에서 내린다.
잠에서 깬 소녀의 전화기에 돌멩이의 문자가 와 있었다.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네요. 지방이지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안에 올라오기는 힘들고, 내일 저녁때 우리 만나요.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이따 전화할게요.>
소녀는 담담하게 마지막 미션을 마쳤다. 아침 10시. 마지막 성냥갑을 마지막 빌딩에 던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점심을 차리고, 아빠와 밥을 먹고, 소녀는 가방을 메고 동네 독서실로 향했다. 책을 편 소녀. 홀가분한 마음의 한 귀퉁이로 알 수 없는 슬픔이 솟았다.
잠깐 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다시 독서실. 밀려오는 식곤증을 못 이긴 소녀의 꾸벅꾸벅 졸음을 책상 위 전화기의 진동이 깨웠다. 돌멩이의 메시지. <예상보다 빨리 올라왔어요. 지금 블루문이에요.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만! 보고 싶어요. 어서 와요!> 잠이 확 달아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BLUE MOON> 빌딩은 지금 난리 통에 폐쇄됐을 텐데? 스마트폰 상단 시계는 21:24. 소녀는 다급히 휴게실로 갔다. TV 뉴스 특보 화면이 비추고 있는 빌딩. 블랙 맨이 폭파를 예고한 빌딩. 처음 보는 건물이다. 아침에 소녀가 성냥갑 폭탄을 던진 그 빌딩이 아니다.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블랙 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뭔가 크게 잘못됐다. 나는 분명히 <BLUE MOON> 빌딩에 성냥갑을 던졌는데. 소녀는 독서실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빨리! 빨리 가주셔야 해요! 제발!”
택시가 출발하자 소녀는 돌멩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으로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BLUE MOON> 빌딩 앞에 택시가 도착하도록 수십 번을 걸었지만 돌멩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21:55. 소녀는 미친 듯이 빌딩 정문으로 뛰어갔다. 빌딩 앞에는 취재진도, 군인도 경찰도 없었다. 한산하기는 해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빌딩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소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하필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에서 멈춰 있었다. 숨찬 가슴을 억누르며 소녀는 계단으로 달렸다. 21:57. 소녀는 <BLUE MOON> 가게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어? 오셨네요?” 민규라는 이름의 돌멩이 후배가 소녀를 반갑게 맞았다. “돌씨. 한돌 씨는요? 지금 어디 갔어요?” “네? 오늘 10시에 소녀 씨 혼자 오실 거라고 형이 그러던데요. 혼자서 한 잔 드시게 세팅 좀 해 놓으라고 말했어요. 여기 앉으세요.” 소녀의 머릿속으로 파란 빛줄기가 뛰어들었다. 21:58.
소녀는 늘 돌멩이와 함께 앉던 바 구석 그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는 돌멩이와 함께 마시던 30년 산 스카치위스키와 잔 한 개, 그리고 육포와 치즈가 놓여 있었다. 21:59. 이제 블랙 맨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겠지.
단 몇 초 동안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 몇 초 동안. 소녀는 결국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건물 밖으로 나가기에는 늦었다. 돌멩이는 빌딩 안에 없다. 그가 나를 왜 여기로 불러낸 것인지. 블랙 맨은 왜 마지막 폭파 예고를 엉터리로 한 것인지.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살아남고, 나는 이제 죽는다. 결국 여기가 우주선의 종착역. 소녀는 손목시계의 초침 숫자를 들여다보았다. 29, 28, 27... 소녀는 위스키 잔을 채웠다. 그래... 그는 부디 살아남기를. 내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돌멩이. 한돌. 고마웠어. 사랑해. 아빠. 미안해. 꼭 혼자서라도 잘 버텨야 해. 소녀가 잔을 들이켰다. 10, 9, 8, 7, 6, 5, 4, 3, 2, 1. 소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행복하다. 난.
제로.
그 시각. 블랙 맨은 손목시계에 떨궜던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천둥소리의 메아리처럼 귓전을 때리는 빌딩 폭파 붕괴음이 잦아들자 블랙 맨은 담배를 떨어뜨리고 구두 끝으로 비벼 껐다. 블랙 맨은 순댓국집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주인 여자가 블랙 맨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은 왜 혼자야? 돌멩이 연애하더니 갈수록 잘생겨지는 거 같아. 순댓국 하나, 소주 한 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