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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

성냥 던지는 소녀 - 24화

by rainon 김승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왜... 성소녀가 성냥갑을 던지게 하신 것인지... 꼭 그 여자여야만 했던 이유라도?” 쭈욱 마신 후 잔을 탁 내려놓으며 돌멩이가 말했다. “백 실장.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소년의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눈앞의 두 남자가 뒤엉켜 치고받고 싸우는 광경은 어린 소년에게 너무도 무서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빠가 꼭 이겼으면... 두 남자의 피 튀기는 싸움을 말리러 달려들 용기는 차마 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꼭 이겼으면...


15분 전. 소년의 집. 바람이 툭 건드리면 당장 쓰러질 것 같은 판잣집.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을 어찌 굴러왔을까 신기한 고급 승용차에서 내린 덩치 큰 남자의 목과 손목에는 번쩍이는 금으로 된 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늘에 뜬 해보다 더 빛나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그날 소년은 처음 알았다. 남자가 집으로 들어서자 소년의 아빠는 당황하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가서 얘기합시다. 여긴 애도 있고.” “애 앞에서 창피한지는 아나 보네? 그럼 제때 갚아야지! 엉?” “나가서 얘기하자니까 좀.” “그럼 나와. 지금 당장!”


“아빠 저 아저씨랑 잠깐 얘기만 좀 하고 올게. 방에서 나오지 말고 잠깐만 있어. 밖에 나오지 마. 절대로.” “응. 빨리 와야 해. 나 배고파.” “라면 끓여줄게. 기다리고 있어.”


소년의 아빠와 금목걸이 남자가 판잣집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던 소년은 슬그머니 뒤를 따라나섰다. 한 번도 아빠 말을 듣지 않은 적 없던 아이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두 남자는 동네 뒷산을 향했다.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꽤 오랫동안 버려진 폐가가 있었다. 두 남자 중에 누가, 그리고 왜 거기로 들어가자고 했던 것인지는 지금도 소년은 알지 못한다. ‘저기 귀신 나오는 집인데... 저길 왜 들어가지?’ 소년은 잠깐 주춤했다. 저긴 들어가기 싫은데... 폐가 바로 옆에는 커다란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다. 동서남북이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소각장에서는 불꽃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달동네 사람들은 거기에 쓰레기들을 버리곤 했다. 소각장에 어른 허리 높이쯤 쓰레기가 차면, 아무나 누구든 거기 불을 질러서 쓰레기를 태웠다. 오늘 누가 불을 지폈나 보다. 플라스틱인지 나일론 속옷인지 뭔가가 타는 고약한 연기가 소년의 코를 괴롭혔다. 기침을 안으로 삼키며 소년은 폐가와 소각장 사이 아름드리 느티나무 기둥에 몸을 숨기고 폐가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금목걸이 남자가 뭔가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소년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아빠가 남자를 향해 뭐라고 하는가 싶더니만, 아빠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소년은 황급히 느티나무 뒤에서 나와 폐가 입구로 달려갔다. 아빠와 금목걸이가 바닥에 뒤엉켜 격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덩치가 더 큰 금목걸이가 아빠 위에 올라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저러다가 아빠가 죽으면 어쩌지? 덜덜 떨면서 지켜보다 서둘러 주위를 살핀 소년의 눈에 연탄집게가 보였다. 한쪽 손잡이가 반쯤 부러져 버려진 연탄집게를 손에 쥔 소년이 금목걸이의 뒤통수를 향해 달려드려는 그때였다. 억! 비명소리는 날카롭지도 크지도 않았다. 금목걸이 남자가 왼손으로는 아빠의 목을 쥐고 다른 손으로 아빠의 옆구리를 찌르는 모습. 소년은 보고 말았다. 둔탁한 단말마. 금목걸이의 손에서 툭 식칼이 떨어지고 하나, 둘, 셋. 몸을 꿈틀대던 아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소년. 손에 든 연탄집게를 떨어뜨리며, 무릎을 땅바닥에 던지며 주저앉았다. 그 소리에 금목걸이가 고개를 돌렸다. 금목걸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금목걸이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직도 소년이 잊지 못하는 그 몇 초. 금목걸이 사채업자와 소년이 몸을 떨면서 서로를 바라보던 그 잠깐을 깬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성큼 달려와서 소년의 멱살을 잡았다. 겨우 일곱 살인 소년은 남자의 굵고 억센 팔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버둥거렸다. 금목걸이가 쓰레기 소각장으로 발을 옮겼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저 좀 놔주세요.” 소각장 불타는 쓰레기 더미 매캐한 연기 속으로 소년을 던지기 직전, 금목걸이의 마지막 말을 소년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날 용서하지 마라. 잘 가라.”


소각장. 소년은 불꽃에 휩싸였다. 폐지와 헌 옷과 플라스틱을 살라먹던 불꽃의 혀는 소년의 몸과 영혼을 핥기 시작했다. 차라리 나를 찢어줘. 그게 덜 아플 것 같아. 제발. 연기에 숨이 막혀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소년의 몸이 파랗게 타들어갔다. 불꽃은 파란색이었다. 소각장 쓰레기 더미 위, 파란 불꽃 속, 목숨이 재가 되어가는 그때, 하늘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서도 파르란 불꽃이 번쩍 뿜어 나왔다. 그리고 세차고 미친 비가 쏟아졌다. 비는 소각장을 흥건히 적시고, 파란 불꽃과 섞이면서 소년의 온몸을 물들였다. 소년은...


반만 죽었다. 반만 귀신이 되고, 반은 인간으로 남았다.


소년의 아빠가 금목걸이의 칼에 죽은 날, 소년은 반만 죽은 날. 소각장에서 일어난 어린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깨진 입술에서 솟구치는 피를 소년은 꿀꺽 삼켰다. 아직 ‘복수’라는 말을 몰랐던 일곱 살 소년은, 바로 그날, 평생의 목표를 ‘복수’로 결정했다.


스스로가 반인반신(半人半神)이 된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의 몸을 휘감고 태우던 파란 빛줄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법을 금세 터득했다. 자신이 초자연적인 힘을 갖게 된 사실을 아무도 몰라야 한다는 것도 소년은 금세 터득했다.


1년이 지났다. 보육원 주차장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주차되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소년은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원장이 소년을 불렀다. 원장 맞은편에 앉은 부부가 소년을 따뜻한 미소로 맞았다.


“이름이 뭐니?” “돌이요. 최돌.” “그래. 이름이 참 예쁘구나. 이제부터 네 이름은 한돌이다. 한돌.” 회장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소년의 어깨를 안았다.


“그렇게 회장님의 양자가 되신 거군요.” 백 실장이 돌멩이의 잔을 채웠다. “알겠지만... 어머니는 내가 그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일찍 돌아가셨어.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여성편력. 좋게 말해서 여성편력이고... 여자사냥이 시작됐고. 뭐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노인네가 그 돈 다 싸들고 죽을 것도 아니고... 자기 돈 맘대로 쓴다는데...”


돌멩이가 잔을 들자 백 실장도 잔을 들었다. 잔이 부딪치는 경쾌한 쨍그랑 뒤로 꿀꺽 소주를 삼킨 백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그 금목걸이 사내는 어디 있나요?” 탁! 돌멩이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제 만나러 가야지. 가서 딸이 파란색 오로라가 되었다고 알려줘야지.”


언덕 밑. 돌멩이와 소녀가 매일같이 입맞춤을 나누던 그 자리.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빛 가루를 뿌리던 가로등이 오늘은 꺼져 있었다. 고장 난 가로등 대신 어슴푸레 푸른 달빛을 등에 지고 돌멩이는 언덕을 올랐다. 연립주택 반지하 월세방의 문손잡이를 간단히 부수고 안방으로 들어가 돌멩이가 불을 켰다.


“소녀 왔니?” 누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금목걸이 사채업자 앞에 돌멩이가 섰다.


“오랜만이야.” 금목걸이 사채업자는 눈만 껌뻑거리며 돌멩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살인. 쓰레기 소각장. 불길에 네가 던진 그 아이.” 소녀의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계속 눈만 껌뻑거렸다.


“좀 전에 성소녀가 빛이 되었어. 네가 내게 주었던 그 파란빛을 소녀에게 선물했다...... 날 용서하지 마라.”


새벽. 돌멩이는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무 데나 갑시다. 좀... 달립시다.” “네? 아. 네. 그러시죠. 출발합니다.”


운전기사가 라디오를 켰다. 돌멩이가 좋아하는 곡이 흘러나왔다. 이게... Lou Reed의 앨범 <Transformer>의 세 번째 곡이지? 아마?


Lou Reed의 건조한 음성이 읊조리기 시작한다. “Just a perfect day......


Lou Reed - Perfect Day

https://youtu.be/9wxI4KK9Z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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