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23화
그는 살아남고, 나는 이제 죽는다. 결국 여기가 우주선의 종착역. 소녀는 손목시계의 초침 숫자를 들여다보았다. 29, 28, 27... 소녀는 위스키 잔을 채웠다. 그래... 그는 부디 살아남기를. 내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돌멩이. 한돌. 고마웠어. 사랑해. 아빠. 미안해. 꼭 혼자서라도 잘 버텨야 해. 소녀가 잔을 들이켰다. 10, 9, 8, 7, 6, 5, 4, 3, 2, 1. 소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행복하다. 난.
제로.
그 시각. 블랙 맨은 손목시계에 떨궜던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천둥소리의 메아리처럼 귓전을 때리는 빌딩 폭파 붕괴음이 잦아들자 블랙 맨은 담배를 떨어뜨리고 구두 끝으로 비벼 껐다. 블랙 맨은 순댓국집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주인 여자가 블랙 맨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은 왜 혼자야? 돌멩이 연애하더니 갈수록 잘생겨지는 거 같아. 순댓국 하나, 소주 한 병이지?”
대답 없이 돌멩이는 테이블에 앉았다. 소주 한 잔, 두 잔, 세 잔...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켠 돌멩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mission complete. 잘 가라. 성소녀.” 위장 안에서 취기가 떠오르면서 지난 3주 동안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돌멩이가 수화기를 들었다. “백 실장 들어오라고 해.” “부르셨습니까.” “알아봤어?” “네. 이름은 성소녀. 23세. 특별한 직업 없이 편의점과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레스토랑?” “네. 패밀리 레스토랑이라고 합니다. 서빙과 설거지 같은 잡일을 한다고 합니다.” “거기 남직원 빈자리 하나 만들어봐. 내가 들어간다. 다른 특이사항은?” “네. 며칠 따라붙어 지켜본 바로는,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센 성격인 것 같습니다. 일은 열심히 하고, 병든 아버지 외에 특별한 인적 교류를 맺은 사람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사는 형편은 아주 어렵습니다. 근로능력이 있어서 정부의 기초수급 지원도 못 받고 있습니다.” “...... 배우 넷 준비시켜. 욕 잘하는 여자애 하나 포함해서.” “알겠습니다. 이사님.”
일요일 오후. 레스토랑 건물 지하 주차장.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돌멩이는 백 실장이 두 쌍의 남녀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사님. 말씀하신 대로 잘 당부해 두었습니다. 이제 올라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차 문을 열고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 끈 돌멩이가 네 남녀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레스토랑 안. 네 명 남녀 배우가 주문을 위해 벨을 누르고, 매니저가 소녀에게 가보라 지시하는 모습을 보던 돌멩이는 천천히 주먹을 쥐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돌멩이가 주먹을 펴자 파란색 빛줄기가 소녀의 눈을 통해 그녀의 머릿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 배우는 욕을 찰지게도 잘했다. 돌멩이는 식사를 마친 네 남녀 배우를 가만히 따라나서며 소녀의 반응을 살짝 살폈다. ‘그래. 따라 나와야지.’
“순댓국집이요?” “따로 섭외하거나 세팅할 필요는 없어. 나 잘 가는데 거기로 할 거야. 거기 오늘 문 열었는지 보고 알려줘.” “순댓국 못 먹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직 제가 성소녀 식성까지는 파악을...” “거기 제육볶음도 팔아.” “아. 네. 그런데 이사님. 내일 아침 회장님 사모님 생신 조찬이 있습니다. 오늘은 술 많이 드시지 않는 편이...”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여자야.” “네?” “앞으로는 생신이라는 말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죄송합니다.”
월요일 아침. 거센 비가 차창을 두들기는 차 안. 조수석의 백 실장이 고개를 뒤로 돌려 말했다. “이사님. 준비됐습니다. 지금 투입할까요?” “그래. 편의점 사장한테도 일러두었지?” “네. 노인이 들어가고 1분 후에 들어가라고 시켰습니다. 최대한 사납게 성소녀를 자극하면서 해고하라고 했습니다.” “거지라는 단어. 꼭 쓰라고 시켰어?” “네. 이사님.” 돌멩이가 차에서 내렸다. 백 실장이 받쳐 든 우산 아래로 돌멩이가 천천히 편의점 통유리 앞으로 다가갔다. 시나리오대로 편의점 사장이 소녀의 배낭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보던 돌멩이가 천천히 주먹을 쥐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다시 돌멩이가 주먹을 펴자 파란색 빛줄기가 소녀의 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녀가 노인 배우를 부축하며 편의점을 나오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돌멩이가 입을 열었다. “저 영감. 제대로 가르쳤지?” “네. 자연스럽게 잘할 겁니다. 이따 성냥갑 전달 절대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월요일 오후. 레스토랑 밖 테라스로 소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돌멩이는 담배를 죽이고 있었다. 소녀에게 다가가서 권하는 음악은 돌멩이가 직접 고른 것. Alan Walker의 On my way. 가사도 멜로디도 제격인 이 노래가 이 여자의 감성 주파수와 잘 맞아야 할 텐데... 퇴근 후, 소녀의 뒤를 밟는 백 실장의 전화. “이사님. 지금 버스 정류장에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돌멩이는 스포츠카의 시동을 걸었다.
그날 밤. 연립주택 반지하 월세방. 열린 거실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Alan Walker의 On my way를 엿듣는 돌멩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돌멩이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꽉 쥔 주먹을 몇 초 후 천천히 폄과 동시에, 성냥갑이 파랗게 불타기 시작했다. 그 파란빛에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을 확인한 돌멩이는 놀이터로 향했다. 그네에 앉은 돌멩이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란빛이 흘러내리고, 곧 돌멩이는 모습이 변했다. 파란빛이 흩어진 자리에는 온몸을 새까만 색으로 덮은 블랙 맨. 그리고 파란 불꽃 구슬을 따라 멍한 표정으로 저기 소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돌멩이가 주먹을 다시 쥐었다 펴자 파란 불꽃 구슬이 소녀의 머릿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최면 시작.
수요일 오후. 레스토랑. 예행연습으로 폭파시킨 재개발 구역의 철거예정 8층 빌딩 뉴스가 모두의 입에 오르내릴 때, 돌멩이는 소녀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오케이. 이제 확실히 미끼를 물었다. 돌멩이가 전화기를 들었다. “네. 이사님.” “OO건설과 XX건설은 반드시 포함. 협력이 절대 안 되는 적대 건설사들 리스트 최종 정리해. 우리보다 서열 아래인 건설사도 한두 군데 포함시켜. 다섯 개로 하자. XX건설 주거래 은행도 포함.”
퇴근 후 소녀와 앉은 순댓국집. 저쪽 테이블 두 노가다 꾼의 대화를 들은 돌멩이가 빌딩 폭파 테러를 화제로 올렸다. 다리를 절룩이는 키 큰 노가다 꾼의 말. “진짜로 빌딩들이 계속 무너지면 우리 같은 하루벌이 노가다들한테 나쁠 건 없을 거여? 그제? 아 무너지면 또 짓지 않겄어?” 돌멩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런 무식쟁이들 입에서 숨은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다니... 짐짓 태연하게 돌멩이는 준비하지 않았던 애드리브를 혼잣말로 던졌다. “그래. 맞아. 2차 대전으로 폭삭 망했던 일본이 기사회생하면서 고도성장한 것이 한국전쟁 때문이었지. 그래... 그렇지...” 물타기로 던진 멘트에 소녀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돌멩이는 놓치지 않았다. 한 30%는 넘어왔다. 고삐를 조이자. 일주일은 너무 길어. 돌멩이는 소녀 집 근처 놀이터를 향해 검은 세단의 액셀을 밟았다.
실전 첫 타깃을 편의점으로 삼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편의점에서 해고당한 억울함과 서러움이 가시기 전에 이 꼭두각시의 동기를 강화하자. 성냥갑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하는 소녀에게 돌멩이는 한 마디 던졌다. “뭔가를 깨끗이 씻어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게 뭔지 아나요? 뒤흔들고 두들겨 패야 해요. 마치 세탁기처럼... 우리는 지금, 이 더러운 세상을 세탁기에 넣는 겁니다.” 돌멩이가 깨끗하게 씻어내려는 것은 경쟁 건설사들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 테러라는 그럴싸한 포장에 가려진 진짜 목표. 다시 일어서는 데 한참 걸리도록 경쟁 건설사들을 주저앉히는 것. 덤으로 무너지는 빌딩들의 재건설은 모두 나의 몫. 부디... 이 여자가 중간에 딴 맘을 먹으면 안 되는데...
목요일. 소녀는 첫 실전 미션을 훌륭히 해냈다. 상을 줘야지. 돌멩이는 소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레스토랑도 쉬는 날인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영화나 볼래요?” 피곤을 못 이기고 어깨에 기대 잠든 소녀를 내려다보며, 돌멩이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었다. 돌멩이는 전화기를 꺼내 자판을 눌렀다. “영화 끝나고 나서 순댓국집 갈 거야. 순댓국집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우리가 나오는 모습을 찍어. 반드시 소녀가 눈치채게 찍어야 해.” “네. 이사님.” “그리고... 블루문 세팅. 일요일에 욕 잘했던 그 배우 지망생 여자랑 민규한테 연습 한 번만 더 하라고 시켜. 자연스러워야 해.” “네. 이사님.”
금요일 오전 10시. 산 중턱 공원 벤치. 파란색 오로라 쇼 관람이 끝나고, 폭파 시각을 성냥갑 폭탄 투척 후 12시간으로 줄이자는 돌멩이의 제안에 반색하던 소녀가 갑자기 물었다. “왜? 저를 고용하신 건가요? 이 일에 왜 저를 끌어들인 거죠?” 돌멩이의 속마음과 입술이 함께 똑같이 움직였다. “애초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죠. 성소녀 씨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말하면서 돌멩이는 백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성소녀 계좌로 5천만 원 이체할 것.” 그러고 나서 성냥갑을 건넸다. “OO은행 본점” 이가 갈리는 개자식들, XX건설의 주거래 은행이다.
토요일 밤. 혹시나 싶어 퇴근하는 소녀에게 던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돌멩이의 제의를, 그럼 그렇지, 파란색 오로라에 벌써 중독된 소녀가 뿌리쳤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소녀를 확인하고 돌멩이는 빠르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검은 세단 안에서 블랙 맨으로 모습을 바꾼 돌멩이는 버스 정류장으로 차를 몰았다. 빌딩이 폭파되며 토해내는 파란색 오로라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녀에게 돌멩이는 세 번째 성냥갑을 건넸다.
일요일 오전 10시. 돌멩이는 예고 메일 발송 버튼을 클릭했다. 3분이 지났을까. 소녀의 전화.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 “이어폰을, 이어폰을 떨어뜨렸어요. 경찰이 가져갔어요. 지문 감식... 할 건가 봐요. 아직 상자가 저기 책상 위에 있어요. 저기 들어 있어요. 아! 경찰이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해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소녀의 지문이 경찰 손에 들어가면 그걸로 끝이다. 아직 소녀를 이용해서 던져야 할 성냥갑이 7개나 남았다.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돌멩이는 성냥갑 폭탄의 기폭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메일 창을 열어 새로 방송사에 보낼 메일을 급히 작성했다.
일요일 오후. 소녀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지금 이 여자가 미션 수행을 그만둬 버리면 모든 건 물거품이 된다. 당근과 채찍. 돌멩이는 소녀를 달래고 블랙 맨은 소녀를 협박해야 한다. 이제 제대로 1인 2역을 해내야 한다. 그날 순댓국집과 블루문에서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신 소녀를 돌멩이는 따뜻하게 위로하며 챙겼다. 이 바보 같은 여자가 무선 이어폰만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돌멩이는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월요일 오전 10시.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두겠다는 소녀에게 블랙 맨의 옷을 입은 돌멩이가 티 나게 몰래 찍은 둘의 사진을 건넸다. 블랙 맨이 돌멩이를 죽이겠다고 소녀를 협박하는 상황. 살해 협박의 주체와 객체가 같은 이 아이러니라니...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나를, 돌멩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쐐기를 박아야 한다. 레스토랑이 쉬는 오후. 이 여자를 바다로 데려가자.
월요일 오후. 바다. 소녀와의 입맞춤. 소녀의 눈빛이 블랙 맨에게 할 대답을, 돌멩이에게 이미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트를 마치고 소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돌멩이의 전화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처음 약속했던 대로, 계속 일을 하겠어요. 당신도 약속을 꼭 지키세요. 한돌 씨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세요.> 돌멩이는 바로 블랙 맨의 답장을 보냈다. <OK!>
그리고 조용한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일주일. 하루 걸러 하나둘씩 경쟁 건설사들의 본사는 가루로 흩어져 허공의 파란색 오로라로 빛나며 사라졌다.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 테러라는 인식은 이미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쇠말뚝으로 박힌 상황. 완전 범죄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요일 오전 7시. 지방 상갓집에 다녀온다는 문자 메시지를 소녀에게 보냈다. 혹시 모를 소녀의 동요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 그리고 오전 10시. 소녀가 마지막 성냥갑을 던지는 그때. 돌멩이는 마지막 폭파 예고 메일을 전송했다. 소녀가 바 <BLUE MOON>이 있는 건물에 성냥갑을 던지는 그때, 돌멩이의 폭파 예고 메일은 전혀 엉뚱한 주소를 알리고 있었다. 자기 입으로 여러 차례 소녀는 말했었다. 이젠 파란색 오로라도, 뉴스도 보지 않겠다고. 가장 어려운 문제를 소녀가 스스로 해결해 주었다. 마지막 성냥갑이 터지는 지점을 비틀면서 폭파 직전까지 소녀의 눈과 귀를 막는 방법.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소녀가 셀프로 처리해 주었다. 밤 9시 20분까지, 절대 뉴스를 보면 안 된다는 돌멩이의 기도가 통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일요일 밤 9시 57분. 폭파 3분 전. 소녀는 돌멩이가 마련해 둔 블루문의 지옥행 좌석에 앉았다.
“많이 드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지요?” 테이블에 쓰러져 뒹구는 소주병들을 일으켜 세우며 백 실장이 말했다. “언제 왔어?” “지금 왔습니다. 이제 그만 드시는 게...” “오랜만에 나랑 한 잔 하자. 이모님! 여기 잔 하나만 더 주세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왜... 성소녀가 성냥갑을 던지게 하신 것인지... 꼭 그 여자여야만 했던 이유라도?” 쭈욱 마신 후 잔을 탁 내려놓으며 돌멩이가 말했다. “백 실장.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