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던지는 소녀 - 20화
방으로 돌아온 소녀가 스마트폰을 열었다. 블랙 맨에게 보내는 메시지.
<처음 약속했던 대로, 계속 일을 하겠어요. 당신도 약속을 꼭 지키세요. 한돌 씨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세요.>
답장이 바로 왔다. <OK!>
다음날. 아침 밥상을 차리는 소녀의 손길이 분주했다. 월세 반지하 연립주택 안은 소녀가 이사 온 이후 처음으로 한우 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 “뻔한 월급으로 무슨 소고기를...” 컵에 소주를 따르며 아빠가 말꼬리를 흐렸다. “페이가 센 곳으로 옮겼어. 식으면 고기 질겨져. 어서 드세요.” 참으로 오랜만에 물끄러미 소녀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더 심해진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까지 겹쳐 두문불출 은둔 외톨이로 살아온 남자의 주름살, 근래 더 깊어졌다. 소녀의 아르바이트로 필요 최소 칼로리와 소주와 약으로 연명해 온 반백의 사나이가 새삼 소녀는 불쌍했다. 십수 년 동안 쌓인 원망도 미움도, 먹고 사느라 바빴던 세월이 흘린 무심함의 가루에 덮여 이젠 가물가물. 가위로 고기를 자르는 소녀의 손 위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설거지를 마친 소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피커 라디오에서는 계속 빌딩 폭파 테러에 관한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제 마트에서 새로 장만한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진열대에서 소녀는 유선 이어폰을 집으며 결심했었다. 두 번 다시는 무선 이어폰 쓰지 않으리. 그날... 소녀의 오른쪽 귀에서 무선 이어폰이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게 유선 이어폰이기만 했어도, 아니 아예 성냥갑 폭탄 투척을 합리화하는 BGM 따위를 듣지만 않았어도... 126명의 원혼이 아직 맴돌고 있을 외벽만 남은 빌딩 근처 정류장에서 소녀는 내렸다. 군인과 경찰과 중장비들 밖으로 폴리스 라인이 에워싼 빌딩에서 꽤 떨어진 파고라. 수북이 쌓인 하얀 국화 송이들 앞에서 고개 숙인 소녀. 눈을 감았다.
변명 없습니다. 용서 구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가서 꼭 벌 받을게요. 언제일지 모를 그날까지만... 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 이게 행복인지는 모르지만... 내게 허락해 주세요. 그러고 나서 꼭... 벌 받겠습니다.
정처 없는 발걸음으로 소녀는 도심 인도를 계속 밟았다. 하늘 끝을 찌르고도 만족을 모를 것만 같은 빌딩 숲. 도로를 가득 채운, 태반이 외제인 고급 승용차들. 문득 소녀는 지난주 월요일이 떠올랐다. 배고픈 할아버지를 거지새끼라며 쫓아내려는 편의점 사장에게 대들고 해고당한 그날 오전. 폭포처럼 땅으로 내리꽂는 빗줄기 속으로 할아버지를 부축해 순댓국집으로 힘겹게 발을 내딛던 그날. 할아버지가 건넨 성냥갑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 지난 일주일.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걸까. 블랙 맨의 말대로 이 모든 것,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인 건가. 블랙 맨의 말대로, 더러운 부(富)의 탑들이 죄다 주저앉게 되면 세상은 깨끗해질 수 있는 걸까. 성냥갑은 정말 세상을 씻는 세탁기인 걸까.
블랙 맨이 약속했다. 이제 앞으로 딱 7번만 성냥갑 폭탄을 던지면 된다고. 그래 눈 딱 감자. 이미 올라탄 이 우주선이 어딘가에 도착할 때까지 난 내릴 수가 없다. 블랙 맨이 약속했다. 이제 절대로 더 이상의 인명 희생은 없을 거라고. 블랙 맨이 약속했다. 시키는 대로만 따르면 절대로 돌멩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돌멩이와 함께 어제 바라보던 바다. 햇살과 바람의 향기 속으로 수줍게 다가온 그의 입술. 나를 사랑하는 그. 내가 사랑하는 그. 그가 보고 싶다...
오늘도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언제 어디서 성냥갑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도시를 휘저으면서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꺼렸다. “그래도 테러범이 폭파 시점을 어긴 자기 실수를 인정하면서 일요일까지는 추가 테러가 없을 거라 공언했는데,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나 봐요.” 레스토랑 밖 테라스에서 담배 연기를 뱉으며 돌멩이가 말했다. 소녀는 잠자코 있었다. 내가 그 테러범의 손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이 안다면... 그래도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해 줄까.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빌딩 폭파범이 나라는 걸 알아도, 이 남자는 곁에 있어줄까.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말 못 할 성냥갑 폭탄의 비밀을 마음에 품고서 나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한 주가 지나갔다. 오전에는 돌멩이를 만나 영화를 보거나 공원을 함께 걸었다. 오후 레스토랑에서도 돌멩이와 흐뭇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가끔 테라스에서 커피를 함께 했다. 퇴근 후에는 순댓국집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국밥 데이트를 즐겼다. 그중 이틀인가는 <BLUE MOON>에서 함께 음악을 들으며 육포를 씹고 위스키를 마셨다. 돌멩이는 매일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언덕 밑 가로등 아래 굿나잇 키스. 거의 하루 온종일을 그와 함께 하는 나날에 소녀는 더 바랄 것 없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동안, 블랙 맨의 약속은 지켜졌다. 일요일의 참사 이후, 월화수목금토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너진 세 빌딩들의 철거와 복구는 느리게나마 진행되었지만, 핏발이 선 눈으로 폭파범을 추적하는 수사기관은 오리무중 제자리걸음이었다. 합동수사본부장은 단서를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을 매일 되풀이하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그 사이 소녀에게 걸린 현상금은 2억 원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십수 년 세월 동안 제로에 가깝던 소녀의 계좌에는 꼭 그만큼의 돈이 입금되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 일요일 밤. 퇴근 후 인터넷 뱅킹 앱을 닫으며 소녀가 중얼거렸다.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 대학이라는 곳. 나도 한 번 가보자. 당분간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은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순간 이후로 단 하루도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던 소녀는 학교 숙제도 제대로 해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집이나 차는커녕 좋은 옷도 액세서리에도 별 미련이나 욕심이 없었다. 아껴 쓴다면, 이 돈이면 1년 정도 아르바이트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다. 그리고 등록금도 해결할 수 있을 것. 소녀는 레스토랑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내일 점장과 돌멩이에게 얘기하자. 고작 푼돈 버는 파트타임 서빙 알바 그만둔다고 날 테러범으로 의심하지는 않겠지.
밤 10시 50분. 소녀의 전화기가 부르르 떨었다. 누군지 뻔했다. <놀이터에 와 있습니다. 천천히 나오세요.> 소녀는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놀이터 구석. 블랙 맨이 그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