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의 딸! 장세연?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화
by rainon 김승진 Sep 11. 2021
응시생 안이지가 OMR 마킹을 완료하고서 3분 후,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OMR 답안지를 수거하면서 유태연은 다시 안이지와 스쳤다. 힐끗 쳐다본 이지의 표정은 평온하고 담담했다. 아까와는 달리 이지는 태연의 시선을 외면했다. 답안지 매수가 응시자 인원과 맞는지를 확인한 후 태연이 조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감독 조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수고들 하셨어요! 이제 나가셔도 좋습니다.”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가는 이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태연을 조장이 툭 쳤다. “뭐해? 빨리 마무리하고 집에 가자. 배고프다.”
학교 운동장.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태연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6년 만의 만남. 그것도 자신과 같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시험장에서 응시생과 감독관으로 조우. 이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속기직은 한 명밖에 뽑지 않던데... 합격할 수 있을까? 마음먹고 덤벼들면 뭐든 해내는 악바리니까... 왠지 합격할 것 같다. 그런데 아까 그 이상한 현상은 뭐였을까? 내가 잘못 본건가? 필름 중간이 뭉텅 잘려나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지의 자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던 그 순간이 생생했다. 숨소리도 안 내고 식은땀만 흘리던 그녀가 갑자기 숨을 헉헉 몰아쉬던 것도 여전히 의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궁금함을 다 덮어버리는 한 가지 사실. 이지를 다시 만났다. 이제 겨우 잊었다 싶었는데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덮어버리는 한 가지 감정. 젠장. 다시 설렌다. 겨우 잊은 건 줄 알았는데 나는 이지를 잊지 못했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태연은 액셀을 밟았다.
그 시각. 고사장인 중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향해 걷는 안이지의 머릿속도 뒤죽박죽이었다. 기적처럼 설사의 위기를 넘겼다. 시험도 무사히 마쳤다. 답이 헷갈리는 두세 개를 빼곤 자신 있게 다 맞혔다. 그런데 태연을 만났다. 6년 만에... 그리고 태연을 다시 마주친 순간, 바로 그 순간의 그 일. 겪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일.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그 일. 이지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생각하지 말자. 오늘은, 좀 쉬자.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사거리 교차로. 네 귀퉁이를 각기 차지하고서 횡단보도를 반쯤 가로막은 선거 유세 차량들 위에서는 나흘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마이크를 붙잡고 꽥꽥거리고 있었다. 저건 소음이다. 소음.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 연설인지 웅변인지를 유심히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같은 색깔로 옷을 맞춰 입은 각 후보 진영의 선거운동원들만 열심히 흰 장갑 낀 손을 흔들며 박수와 환호로 호응할 뿐, 대부분의 행인들은 무표정하게 그 앞을 지나쳤다. 선거든 후보든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초록불이 켜지자 천천히 횡단보도를 걷는 이지의 진행방향, 길 건너 맞은편 오른쪽에서는 유세 차량에 오른 젊은 여자 후보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트럭 위 무대 상단에 크게 걸린 현수막. “젊은 일꾼! 한산의 딸! 기호 2-가. 장세연” 세연? 장세연? 설마 그 장세연? 이지는 웅웅 울려서 뭐라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 스피커의 굉음을 향해 다가갔다. 트럭 위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쥔 여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내가 아는 그 장세연인가? 굳이 시험 막판 초치기 공부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원래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안이지는 이번 지방선거 선거벽보에 눈길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로 지금, 후보의 포스터를 일부러 들여다보는 것이 이지에게 선거권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개미만 한 글씨로 장세연 후보 포스터 귀퉁이에 적힌 약력을 읽어 내려가던 이지가 조그만 탄성을 내질렀다.
맞네. 너구나, 세연이. 장세연. 근데 얼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돈 어지간히 들었겠다. 그래도 잘 고쳤네. 의학의 힘은 대단해.